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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빌립을 통로로 하는 성령의 전도

본문 / 행 8:26-40

 

 

1. 도구와 통로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사도행전을 우리는 흔히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사도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인공이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오해하여 말하기를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 사도들처럼 능력 있게 전도하자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살펴 본 것처럼 이방인 취급 받던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은 사도들의 전도 계획과 비전과 열망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라 핍박으로 흩어진 자들에 의하여 복음이 증거 된 것입니다. 그것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자 한 사도들에 의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 된 것이 아니라 집사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친히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빌립을 사용하시고 사도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주도적으로 증거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회의를 하여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전에 이미 성령께서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결국 사도들은 뒤따라가면서 복음이 이렇게 증거 되었음을 보고 알게 되는 말 그대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명령자는 성령님이시고 빌립은 시키는 대로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시키시는 것을 빌립은 거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행8:26)고 합니다. 주의 사자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 가라고 하시는데 왜 가라고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광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도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에 가야 하는데 성령께서는 빌립을 광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 없는 광야에 가서 무슨 전도를 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가라고 하시니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경배하러 왔다가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그에게 가까이 가라고 하시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사람이 읽고 있는 것이 이사야 5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례를 주고 나니 다시 성령께서 빌립을 이끌어 다른 곳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내용도 가만히 살펴보면 빌립의 전도가 아니라 성령의 전도인 것입니다. 단지 빌립은 도구와 통로로 사용되어지는 것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령행전

이제 그 전도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내시는 에디오피아의 궁정 재무 장관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경배하러 왔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와서 경배를 하고 돌아가면서 이사야서 사본을 구하여 가지고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성경은 두루마리로 된 성경일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성경을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것이기에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을 구하여 읽고 내려가는데 마침 읽고 있었던 본문이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본문에 인용된 말씀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으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7-8)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느냐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내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가는 이 사람이 선지자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하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복음의 핵심에 근접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 집사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고난 받는 이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었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서 53장 앞부분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고 합니다. 그가 고난당하심은 자기의 죄가 아닌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 사람이 잘못하여 그렇게 고난당하는 것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무엇입니까?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복음을 들은 내시가 “내가 세례를 받는 일에 무슨 거리낌이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 오늘 본문 37절을 보면 ‘없음’ 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에 간혹 이러한 부분이 나오는 것은 성경의 사본 중에 어떤 부분이 보이지 아니하거나 또는 상한 부분이 있기에 그대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충한 다른 사본들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음’이라고 한 부분에 숫자가 적혀 있고, 성경 책 밑에를 보면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나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행8:37). 그러자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 올 수가 없는 자입니다. 이방인이라고 개종을 하고 할례를 받으면 유대인에 편입이 됩니다만 그러나 내시는 할례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명기 23장에 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1)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시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데 빌립은 분명히 율법을 알면서도 이방인이요 내시인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감히 사도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일을 집사가 행한 것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교회에서의 치리감이며, 제명 출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집사가 감히 세례를 베풀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지금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방인도 내시도 상관없이 얼마든지 주님께서 부르시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복음을 듣고 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고난 받으신 주의 종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에서 대속하는 종으로 인하여 이사야 56장에서 이방인도 고자도 주님께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6장을 보면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56:3-8)고 합니다. 내시가 어떤 사람입니까? 이방인이요 동시에 고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께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였겠습니까? 여호와의 언약을 굳게 잡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방인이며 고자인 사람이 하나님께 연합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언제 안식일을 지킨 적이 있습니까? 안식일 지키시려면 안식교에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과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삽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잡기 보다는 돈을 굳게 잡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 연합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이사야서 56장 8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사56:8)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시고 때가 되매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임을 받는 자들은 자기들이 준비를 하였거나 비전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 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도 내시를 몰랐고, 내시도 빌립을 몰랐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만나게 하시니 만난 것이고 그리고 헤어지게 하시니 서로 각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열심

신약에서 이렇게 복음이 증거 되는 것도 구약의 여호와의 전쟁 방식과 일치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이란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을 붙여주심으로 이기게 하시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할 때 언제나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께서 승리하신 전쟁에서 전리품을 거두러 다닌 것입니다. 신명기 3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31:3-8)고 하십니다. 모세가 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면서 누가 앞장서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앞장서시고 적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4:34-38)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둔다고 하신 것입니다. 노력하신 분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을 보내신 주님께서 먼저 다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은 평소에 전도에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리 저리 자기 살길 찾아다니다가 부딪힌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 자신의 이력이나 경력이 전혀 소용이 없도록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1년 전에 알았겠습니까? 3년 전에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함께 예수를 믿는다고 모여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일 어디로 갈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주의 말씀처럼 땅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구와 통로 삼아 우리 하나님께서 그 하신바 된 약속과 계획대로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은 내가 나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별 볼일 없어 보인다고 하여도 그것이 복음을 알게 하시고 증거 하게 하시는 일에 전혀 방해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래 가지고 무슨 복음을 증거 하겠는가 하지 마시고 우리가 처한 그 어떤 곳에서라도 주님이 일하고 계심을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일하십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상황과 상관없이 오직 주님의 계획과 약속을 따라 일하십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를 통로로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그냥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생각도 계획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를 비워 주님이 쓰시기에 아름다운 도구가 되어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어 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에서 말하는 증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2.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성령과 빌립의 관계는 어떤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3. 광야에서 만난 이디오피아 내시의 질문과 빌립의 답은 무엇입니까?

4. 이디오피아 내시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이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고 믿는 자(이스라엘의 총회)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이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고 주의 백성이 되는 본문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7. 신약의 복음 증거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의 방식과 같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성도인 우리가 우리의 처한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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