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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울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뜻

본문 / 9: 1- 9

 

 

1. 우리 생각

우리나라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다 또는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속담은 우리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지극한 정성과 공을 들이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에도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정화수 떠 놓고 정성을 다하여 빌고 또 빌었더니 천지신명도 감동하여 나에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하여 주셨다거나 또는 우리 아들 장원급제하게 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결국 신이 내린 특별한 능력보다 나의 정성을 얼마나 제대로 바쳤는가에 희비가 엇갈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속담이 얼마나 비복음 적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돌아서면 비복음 적인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담 가운에 오늘 말씀과 적용하여 볼 내용이 있는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속담입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고나면 그 사람의 과거는 언제나 미화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을 복원시켜서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근면 성실하였다든가 또는 집념이 대단하였다든가 하는 그런 일화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적하는데 그 원인을 결과에 맞게 잘 포장하고 꾸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사울이 주님께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 그러면 항상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울은 날 때부터 정통 유대인이었으면,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였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업 받았고,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력에 대해 아마도 우리는 그래, 사울이 평소에 그런 사람이었으니 주님께서 그를 위대하게 사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도 바울 자신은 그런 것들이 오히려 해로운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랑들이 육체였으면 아무른 유익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오직 주님의 부르심의 은혜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워낙 자랑하니 한 번씩 나도 그러한 일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자기의 잘남을 증거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의 해로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1-9)고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다는 것들 그래서 열심히 추구한 모든 것들이 오히려 해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고백임에도 우리는 이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우리 자신들의 생각이 앞 선 자들인 것입니다.

 

 

2. 부름 받음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에서 주의 복음이 증거 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마리아인들과 에디오피아 내시 그리고 오늘 사울에게 까지 와 있는데 이 세 부류의 사람 중에서 과연 누가 가장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겠습니까? 사마리아인들도 자신들의 죄를 압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에디오피아 내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은혜의 복음이란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에는 은혜의 복음이란 이단의 괴수가 전한 잘못된 교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울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 흠이 없이 살아 왔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한다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전도하려다가 오히려 전도 당하고 올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한번 상대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성경을 척척 들이대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잘 말하는지 감당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워온 정통과 교리를 지키며 살아온 예수 잘 믿는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도 곧잘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이야기하지만 놀랍게도 지성이면 감천이고’, ‘공든 탑이 무너지랴또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이런 속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이란 너무나 생소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흠이 없는 자라고 할 만큼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며 더 나아가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도 된다는 공문서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단지 권세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서도 얼마나 해박하게 아는지 이론적으로도 얼마든지 공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자가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전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본문과 같은 장면을 대하면 어리석게도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오늘 본문에 사울아 사울아 하시면서 사울을 찾듯이 나도 한번 화끈하게 그렇게 부름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삶 가운데 이게 도대체 예수를 믿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때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과 에디오피아 이방인 내시와 사울 중에 누가 더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전도자의 말을 듣고서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도자의 말을 듣기는커녕 전도자를 잡아서 죽이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를 주님께서 부르신 것은 그의 열심과 그의 구약 지식과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것과 로마의 시민권도 있으니 주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갖추게 하시고 또 친히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본 바처럼 그러한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부르심에서 무엇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반드시 불러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한번 부르셔서 안 되면 두 번, 안 되면 세 번, 네 번, 안 되면 될 때까지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니 단 한 번에 항복하고 나오도록 부르시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힘으로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은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항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온 마음에서 항복이 나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9:1-2)고 합니다. 얼마나 위세가 대단합니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합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여러 부하를 거느리고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직접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십니다. 설교도 아니고, 많은 말씀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그 위세 등등하던 사울이 땅에 엎드려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장님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같이 가던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위세 당당하던 사울이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니 완전히 땅에 엎드려져서 장님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부름 받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말로 할 때 알아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을 부르신 예수님의 영광과 권세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부할 승천하여 계신 주님은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를 가시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주님을 직접 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 우리가 다 죽을 터이니 당신이 대신 전하여 달라고 한 것처럼 지금 주님의 음성을 직접 보고 듣는다면 사울의 꼴이 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품에 기대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그 주님을 환상 중에 뵙고는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변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집부리면 부릴수록 매만 더 맞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심

어느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자기 남편이 영 교회에 적응을 못하고 겉돌고 있다가 한번 어려움을 당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여 집사가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남편이 돌아오겠지요?’ 라고 묻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집사님! 아직도 멀었습니다.’ 한두 번 그래가지고 나올 것 같으면 양반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고집이 어지간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듣겠다고 나와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아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겪습니다. 정말 위험천만한 일들도 만나게 되고 또 그런 분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공통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그 마음 변치 말고 예배당에서 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교통사고를 죽을 뻔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번에도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기적이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겠노라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도 하고, 도장도 찍고, 복사도 해서 확실하게 신앙의 회복을 볼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면 주위에 서 있는 모든 가족들이 좋아라 합니다. 그런데 퇴원하고 몇 번 나오는가 싶더니 몇 년째 감감 무속식입니다. 물론 가끔 소식을 듣기도 하고 또 보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분이 주님의 택하신 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라면 결국 하나님께서 항복시키셔서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43:1-13)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지목하여 부르시면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께서 어떤 속량물을 지불하시고서라도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13절에서 누가 막으리요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을 부르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런 자도 불러서 사도로 사용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사울보다 못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 역시 자신이 그렇게 사용되어 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5-16)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울보고 당신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이더니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이렇게 능력 있게 쓰임을 받는군요?’ 라고 물으면 아마도 사도는 아니요. 나같이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 붙들림을 받아서 쓰임을 받는다면 당신은 나보다 열배 백배나 더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의 열심임을 아시겠습니까? 사울을 부르시던 그 주심께서 친히 매를 드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아내와 자식을 통하여 또는 환경을 통하여서라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열심과 부르심에 이제 손을 들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우리 생각에 빠져 주의 손길을 외면하지 마시고 그 분의 손을 잡고 함께 십자가의 길을 넉넉히 걸어갈 수 있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 중에 하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사도 바울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성경의 말씀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

3. 사마리아 인과 에디오피아 내시 그리고 사울 중에 복음 전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누구이며 그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오늘 사울의 부르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알 수 있다고 하십니까?

5. 사울을 부르는 모습에서의 우리의 착각과 주안에서의 지혜로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우리는 어떠한 자들이라고 하며 또 지금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하나님의 사울의 부르심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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