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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본문 / 9:10-19

 

 

1. 율법

오늘 말씀은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게 됨으로 눈이 보이지 않았다가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안수함으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가지고 역시 바울은 달라,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변화시켜 주시니 저렇게 능력 있게 주님의 종이 되었구나 라고 쉽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어떤 자질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복음을 듣기에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복음에 대하여 온 힘을 다하여 멸하고자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부르신 것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이요 또한 앞으로 구원 얻는 자들에게 모델케이스가 되게 하고자 한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역할 못지않게 좋은 모델이 되는 사람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양편에는 두 강도가 있었지만 두 사람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구원 받은 강도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까? 살인강도이기에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강도는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있어 바울 못지않은 역할을 한 것이라 봅니다. 아무 공로 없이 구원 받은,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 최고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생각에는 사도 바울이 천국에서 듣고 기분 나빠할 것 같겠지만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능력이 더욱 자랑되는 것이니 바울도 더욱 기뻐할 것입니다. 목사님이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해도 어른들은 자신 없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이래가지고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도 없고 천국 갈만한 자격도 없는데 은혜로 간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목사님들이 많이 해 주시는 이야기가 바로 이 강도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제야 그렇다면 나도 갈수는 있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자신은 살인강도가 아니니 그 사람보다는 조금 낫다는 생각을 하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런 강도가 구원받았고 또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고 다니는 사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통하여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주님을 찾고 믿는 인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모델로 사용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율법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 주님을 배척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할인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역할로 이스라엘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인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장 의롭게 행동한다고 한 행동이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19-24)고 합니다. 율법의 기능이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이 가입함으로 나는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을 지키라고 준 것이니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그 율법을 새롭게 해석을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행위로만 율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의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율법 수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동기까지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바로 산상수훈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자들이라도 이 산상수훈에 비추어 지면 모두 다 부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복음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으면 살인자가 아니라서 의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구제 금식을 하지는 않습니까? 내일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 말씀 앞에 어느 누가 나는 온전하게 의롭다고 할 자가 나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제대로 보게 된다면 나는 부정한 자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문둥병자와 같은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자기가 접촉하는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비쳐지니 우리의 실상이 문둥병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좋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모두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최초로 하신 일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8:1-3)고 합니다. 문둥병자에게 접촉하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부정함을 자신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 들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옳다고 해온 모든 것들이 전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한 것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배척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에게 가려진 비늘이고 수건인 것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유대인들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이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있었는데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자로서 주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친 자라고 하자 주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증거할 택한 그릇이라고 하시면서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서 찾아 안수하였더니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영광의 빛 때문에 3일간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창조하여 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제 깨달을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3:16-21)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16절 말씀만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당신도 믿고서 영생을 얻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람들이 빛을 알아보고 믿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인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말할 때 주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에 비늘이 덮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지 않으시면 결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에서는 사울 곁에 함께 서있던 자들은 무슨 소리를 들었어도 빛은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9장에서는 소리는 듣고 빛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22장에서는 빛은 보았는데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소리를 듣고 빛을 보아도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소리를 들었든지 빛을 보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3-6)고 합니다.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데 복음이 가려지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망하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세상신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기로 작정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며 복음인 것입니다.

 

 

3. 은혜 받은 우리

그러므로 바울 사도만 복음의 빛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죄인임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고서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아는 자는 이미 복음의 빛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보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다른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직 비늘이 덜 벗겨져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벗겨지기는 하였는데 자꾸만 안개가 끼어서 그런 것입니까? 이런 일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아직도 수건이 가려져 있다고 말한 곳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2-18)고 합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고서도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사라질 영광인데 그 결국을 보이지 않으려고 수건으로 가리운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을 보면서 수건에 가려진 것처럼 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너를 세우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보면서 자유하게 하는 영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가득하여 주님의 영광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까? 비늘이 벗겨져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흐려진 시각이 맑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오히려 보고 있는 우리는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를 보라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무엇을 보고 살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의 눈에 비늘 같은 것만을 벗겨내신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만물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듯이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서는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소풍 온 것이라 했습니다. 영원히 소풍 온 장소에서 살 자가 아니라 언젠가 우리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돌아가야 할 집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곳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자 이제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이 시간 우리의 고백이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바울은 너희 눈앞에 주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든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눈에 자꾸만 비늘 같은 것을 덮어씌우려고 합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지 말고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밝히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합니다. 그래서 안개가 걷히듯이 주님의 나라가 밝히 보이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이 기뻐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울과 구원 받은 한편 강도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이스라엘과 사울은 그 맡은 역할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율법의 용도와 율법에 대한 오해 그리고 주님이 하신 율법의 재해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우리가 문둥병자와 같다는 의미와 주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유대인들에게 또 오늘날 우리에게 가려진 비늘과 수건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은 무엇이며 또 그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7. 믿음이란 무엇을 구하는 것이며 또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8. 사울과 같이 비늘이 벗겨진 자의 삶은 어떠한 삶이라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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