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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함

본문 / 9:19-31

 

 

1. 능력

사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새로운 시각이 생겼습니다.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구제 불능의 죄인인가를 알고서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는 자로 갔다가 이제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 하자 많은 사람들이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며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힘을 더 얻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주의 사도들이 성령이 임하게 되자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던 그 증거를 이제는 그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증거 하는 일에 힘을 더 얻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힘을 더 얻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다는 말씀을 보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그래 복음을 증거 하는데 힘이 있어야 하지 그러니 힘을 더 얻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더 얻어서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 하자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힘을 더 얻은 모습과 우리가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과는 무엇인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주의 복음을 널리 증거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또는 돈을 많이 벌어서, 권세를 가져서 주의 일을 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힘들은 세상에서 통하는 힘이지 주님의 일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힘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런 세상의 힘을 공생애 시작에서부터 거절하시고 시작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40일을 금식하셨는데 그때에 사단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면서 물리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서 그러면 사람들이 종교적인 슈퍼스타로 떠받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시며 물리치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높은 산에 가서 순식간에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예수님은 주 하나님만 경배하라고 하시면서 물리치십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 세 가지의 내용만 있다면 세상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배고픈데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다 먹고 살만하니 다른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능력, 세상의 부귀영화, 이 모든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한결 같이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힘을 가지고 일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울이 힘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 사울이 힘을 더 얻어서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주님께 세상의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죄란 주님을 떠나 독립한 것이 죄라면, 구원이란 이제 주님께 의존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주님만을 힘 삼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일용할 양식이란 단지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날마다 힘입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평생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먹을 것만이 아니라 자손대대로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양식만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꺼번에 큰 능력 받아서 주님은 저 멀리서 구경만 하시게 하고 내가 구하여 받은 능력으로 한번 힘껏 뽐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을 능력이라고 하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힘을 더 얻어

오늘 본문에 사울이 힘을 더 얻어서 한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면서 사울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온 사울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능력을 받아 더욱 힘을 얻었기에 잡으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외치면 그들이 모두 엎드려 자빠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것을 능력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피하여 광주리에 줄을 메어서 성 밖으로 내려 보내지는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내려놓듯이 사울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을 더 얻은 사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힘을 구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이러한 힘을 구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구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고생한 만큼 나중에 나타날 칭찬과 영광이 계산된 차원에서의 문제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구하지, 죽기 위하여 구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도세상에서 무엇인가 잘되어야 주님이 증거가 잘되지, 어떻게 실패하고 망하고 어렵게 되었는데 주님을 잘 증거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되어야 예수님을 잘 증거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렇게 전하여져도 믿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의 택한 백성들, 즉 창세전부터 믿기로 작정된 자들은 그러한 외침에도 믿겠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시고, 종교적으로 성공하셨고,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가지셨다면 우리들의 그런 생각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각처럼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저주 받아서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어떻게 세상에서 잘되어야 그러한 예수님이 잘 증거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세상 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자신에게 있는 가문과 학력과 권세들이 오히려 해가 되었기에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는 일에 도움은커녕 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되어야 전도도 된다는 것은 아직도 십자가를 모르기에 하는 말입니다. 아직도 그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끼어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갑니다. 얼마나 볼품이 없는 모습입니까? 주님께 힘을 더 얻었다면 천군 천사가 호위하고 가야 하는 것으로 그 모습이 그려져야 그럴 듯한데 오히려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증인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겨우 다메섹에서 도망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사도들과 사귀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사귀고자 하나 사도들이 사울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자를 일망타진 하려고 일부러 개종한척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사도들까지도 꺼려하는 것입니다. 이때 바나바가 사도들에게 사울을 데리고 가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를 말하자 그제야 겨우 사도들과 사울 사이의 교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사도행전 4장에서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다 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를 보아서 사울을 받아들인 정도인 것입니다. 사도들과 교제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또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도망가는 것입니다. 가이사랴로 가서 다소로 보낸 것입니다. 다소는 사울의 출신지이지만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렇게 다메섹에서 죽이려 하여 도망가고, 예루살렘에서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을 더 얻은 사울의 모습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이 교회가 힘 있게 성장하는 모습처럼 보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지리멸렬하면서 도망 다니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9:31)고 말씀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자들을 유대인들이 잡아 죽이려고 하고 그래서 사울은 도망 다니는 중인데 성경은 오히려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핍박하다가 개종하였기에 이제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는 중에 있는데 어떻게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무엇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빈틈없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그리고 유대에서 유대의 변방인 갈릴리로 이제 그 지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기에 사울을 죽이려고 하여도 교회는 변함없이 든든히 서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이런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란 세상의 힘으로 결코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세상의 힘으로 세우지도 못하지만 세상의 힘으로 무너뜨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음부를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 우리의 삶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나라에 어떤 일만 있으면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인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가 이렇게 많으니 함부로 건드리면 다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들이 구하며 찾는 힘이라는 것들이 대개 이런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깔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구하는 것이 바로 힘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힘이란 이런 세상의 힘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변함없이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살기에 계속하여 땅의 것만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잠시 잠간씩 눈을 들어 그나마 하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이렇게 하늘을 주로 바라보십니까? 우리는 자기 힘이 있을 때는 결코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힘이 있다면 그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이지 결코 주님을 붙들지 아니하는 자들이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8-10)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바울 사도가 잘못하여 환난과 고생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주의 복음을 증거 함으로서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망정 왜 환난과 고생을 당하게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왜 앞이 캄캄한 일이 닥치는 것입니까? 자기 힘과 세상의 힘을 의뢰하지 말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7-18)고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이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바라고 또 무엇을 힘 삼고 있습니까? 또 그것을 구하여 무엇을 이루려 하십니까? 주의 복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혹 내 자신을 위하여 그러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를 위한 것이라면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힘을 얻어 나는 어찌 되어도 괜찮고 오직 주의 복음과 사역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되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매일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얻고자 하는 힘과 바울이 얻은 힘은 무엇입니까?

2. 죄와 구원을 무엇이라 하며 또 우리가 얻고자 힘은 무엇이 잘못 된 것입니까?

3.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우리가 가진 잘못된 생각 중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오늘 본문에 나타난 힘을 더 얻은 사울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5. 울의 도망 다니는 모습 가운데서도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며 그렇게 말씀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성도의 힘이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합니까?

7. 사도 바울과 성도인 우리가 당하는 환란 가운데서 배워야 하는 주님의 손길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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