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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주님의 일하심

본문 / 9:32-43

 

 

1. 주의 일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계시의 책입니다. 물론 인간의 반응도 있지만 우리가 보아서 알듯이 인간의 반응이라는 것이 거의 다 하나님과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성경을 주신 것은 우리가 잘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라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법은 우리에 앞서 이미 유대인들이 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특별한 민족이기에 선택을 받았고, 선택을 받았기에 율법을 주신 것이고,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들로 하여금 잘 지키라고 주신 것이기에 율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에 이른 것입니다. 결국 이를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공개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책들은 모두가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신화를 다루고, 초월적인 것을 다룬다고 하여도 결국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이야기들뿐인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인간의 힘을 합하여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식의 이야기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있기에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항상 그런 방식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면 주님의 일하심이 먼저 보이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하였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인 관심사는 내가 어떻게 함으로 힘을 더 얻는가 하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애니아가 8년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고, 도르가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역시 베드로는 다르다.’ 라는 식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서 말하고, 베드로가 가서 기도하니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구나. 도대체 우리는 언제쯤 베드로처럼 한번 되어보나’, 하는 식의 결론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런 시각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 내용 중에도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주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주님을 만나고서 힘을 더 얻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니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주리 타고 도망가고 겨우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교제를 하게 되나 유대인들이 또 사울을 죽이려고 하자 다소로 피신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 한 사람이 개종을 하였다고 핍박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이 심하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마저 죽이려고 하는 세상은 여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한다는 것이며, 세상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9:32)라고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룻다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는 것으로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미 룻다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다고 되어있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바다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도시로 예루살렘의 변방입니다. 그리고 욥바는 지중해 바다의 항구입니다. 그런데 벌써 이런 곳에 성도가 있었고 주의 제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곳에 전도를 하였는지는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미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곳을 심방하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심하니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성도를 만나 서로 위로를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바울 그러면 그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호응을 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그러한 능력의 사람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닌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도록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가서 하는 일이란 바로 그런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 하는 일인 것입니다. 룻다와 욥바에 그렇게 복음이 증거 되고 믿는 자들이 세워진 것은 오직 주님의 일하심 때문임을 증거하는 것이 베드로의 일입니다. 은혜로 되어졌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이 베드로의 일입니다. 그렇게 증거 하는 모습을 보면 베드로의 능력도 아니고, 애니아의 반응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2. 오직 주님만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9:33-35)고 합니다. 애니아가 8년 동안 중풍 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베드로가 일으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니 곧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꼭 남의 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자기 기도의 힘과 경건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면 며칠 금식도 하고, 통성기도도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유은사 집회한다는 광고도 붙이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누구를 고쳐 주실지 또는 아닐지는 자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면 무조건 병 고침 받는다고 광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니아에게도 어떤 조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며칠 하라든가. 성경을 몇 번 읽으라든가, 주기도문을 외우라거나, 사도신경을 반복하여 외우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고 하며 침상을 정리하고 일어나라고 하니 일어나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로 몰려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제자를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채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여서 보좌에 앉으신 채로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맡겨 두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도의 지상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직접 명령을 받고서도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 되니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느냐고 의아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대해 베드로까지도 얼마나 꺼려하였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주님의 말씀처럼 땅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일은 결국 베드로가 잘했다, 사울이 잘했다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니아가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심을 증거할 뿐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비교 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38년 된 중풍 병자가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연못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에게는 기회는 없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자비의 집에 철저하게 자비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내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는데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물이 동할 때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내려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니 벌떡 일어나 걸어간 것입니다. 베데스다 주위의 모든 사람은 물이 동할 때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에 들어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야 고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38년된 병자를 고침으로서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을 다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침 받는 것이 아닌 오직 주님으로만 말씀으로만 치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치료자인지를, 누가 우리의 의원이신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 날이 안식일이라 사람들이 왜 안식일 날 침상을 메고 가느냐고 합니다. 안식이 없는 안식일, 자비가 없는 자비의 집에 누가 안식과 자비를 주시는 분이신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하신 바를 베드로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자신의 말씀으로 일으키는데 오늘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베드로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이름도, 애니아의 이름도 아닌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사건은 다비다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다비다는 아람어이고, 도르가는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여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살았을 때 많은 선행을 베푼 사람입니다. 많은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지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자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눕혀놓고서는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기도하고서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도대체 무슨 수로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일어나 앉아서 베드로를 보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보면 또 역시 베드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8년 된 중풍 병자는 기도 안 해도 말 한마디로 일으키고, 다비다는 기도 한번 하니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1-12)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사도들을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때 하는 말이 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니아가 일어나고,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베드로의 경건도 애니아의 반응도 도르가의 선행도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누가 전도를 잘 해서 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잘 알아들어서 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의 이름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두려고 하는 우리의 자존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서 20장에도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0:44)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서 거듭 거듭 하나님을 반역합니다. 진멸하여야 마땅하나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진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여호와를 제대로 아는가 하면 우리의 악하고, 더러운 행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길로 인도하시면 그제야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사울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능력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니아가 일어나든, 도르가가 살아나든 증거 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와 바울이 증거 하는 분은 바라보지 않고 자꾸만 베드로와 바울을 보면서 영웅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연약한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직 주님의 은혜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바울도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주님의 일하심만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우리라면 우리 또한 어떠한 길을 걸으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무두장이 집에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이제 누구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43절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9:43)고 합니다. 여기 무두장이란 갖바치를 말하는 그 무두장이 시몬이라 하는 자의 집에 머문다고 합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죽은 짐승들을 만져야하는 이러한 자들을 꺼려합니다. 특히 레위기 11장에 보면 부정한 짐승의 시체를 만지는 것도 부정하다고 하였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런 사람의 집에 유하는 것은 주님의 일하심을 알고 있고 또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통하여 그렇게 일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면 볼수록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통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갖바치의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전에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따를 때는 시기와 질투로 높아지고자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배신하여도 자기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찾아오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보고서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알고 보고 또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밝히 조명되어지리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는 누가 드러나기를 원합니까? 주님이라고 대답은 해도 아마도 나라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라 할지라도 오늘도 일하시는 우리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 우리의 그런 생각과 우리 자신은 부인 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쁘게 십자가를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의 삶 속에서도 항상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오직 주님만이 나를 통해 선포되어 지는 삶이 우리의 기쁨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은혜의 삶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성경을 보는 방식이 유대인들과 같다고 말하는 의미와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2. 베드로 사도가 룻다와 욥바에서 전하는 증인으로의 선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3.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애니아의 병 고침을 통하여 나타난 모습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5.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기적 적인 일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가지는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7. 대인들이 무두장이를 꺼려하는 이유와 그럼에도 베드로가 그런 자의 집에 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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