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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본문 / 11:19-26

 

 

1. 안디옥

오늘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예수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함께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남을 보았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었습니다. 이러한 핍박을 피하여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곳에서 도를 전하는데 바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 것입니다. 벌써 사마리아와 에티오피아 내시 그리고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아직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정도로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벽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흩어진 곳에서 복음이 전파 되었는데 그 중에 몇 사람이 안디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1:20-21)고 합니다.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개념은 유대인이 아니면 다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헬라인이라고 하면 그들이 보기에는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헬라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여지자 교회에서 어떻게 된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바나바를 파송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11:23)고 하는 것을 봅니다. 바나바가 와서 보니 제대로 복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을 보고서 기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의 전도도 역시 이름 없는 몇 사람이 전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으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큰 무리가 더하여졌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안디옥에서 1년간 가르친 것입니다.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믿는 무리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에게 이런 부름을 받게 되었을까요?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로마가 제일 크고, 그다음은 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이고 그리고 다음이 바로 안디옥인 것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보면 세 개의 큰 도시가 삼각형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은 수리아의 총독이 거주하는 곳이며 로마의 군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로마는 한참 번영을 누리고 있는 시대였기에 지배계급은 수많은 노예들을 거느리며 쾌락을 일삼고 살았습니다. 그런 로마가 제국으로 세계를 지배하기 전에 일어나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은 이 헬라제국에서 파생되어진 헬레니즘이 바탕인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섬긴 신이 바쿠스와 다프네라고 합니다. 바쿠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이고 별명이 바코스인데 로마신화에서 바쿠스로 불리는 신으로 술의 신입니다. 다프네는 신은 아니지만 신들의 경쟁에서 희생된 여자입니다. 결국 나무로 변하게 되는데 그 나무가 월계수입니다. 그래서 올림픽 마라톤에서 승리하면 인간들 중에 가장 위대하고 강한 자라고 여겨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도 그리스 신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로회복제로 박카스를 마시지 않습니까? 박카스는 앞에서 말한 술의 신인 바쿠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신들을 섬기는 안디옥의 문화적인 환경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책에 보면 디오니소스 즉 바쿠스 신에게 바쳐지는 제사는 상당히 무절제하고 음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문화에 로마의 힘과 부가 더하여진 도시의 타락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문화재들에 보면 바쿠스의 신도가 술에 취하여 몽롱한 상태로 있는 조각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안디옥에 복음이 증거 되고 믿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자 그들과 구별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의해 불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쿠스를 믿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절제와 음란으로 가득한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

이처럼 주를 믿는 자들이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들과 다른 기준의 삶을 살게 되었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호칭을 그저 윤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착하게 산다는 차원에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세상에서 착하게 바르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런 차원에서만 그리스도인을 확인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회사에 충실하고 가정에서 자상한 남편으로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윤리 도덕을 전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하는 식으로 교회가 나가면 세상의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종교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다 착하게 살고자 종교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신이신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나는 부처를 믿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 너는 예수를 믿고 착하고 바르게 살면 되지. 너희는 왜 그리 독선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과연 무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예전에 어떤 스님이 자신을 더러운 것을 닦아 내는 걸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스님을 큰 스님처럼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 하십니까? 우리가 걸레가 되어서 어떤 더러운 부분을 닦는다고 하면 그 부분이 깨끗하게 닦여지는 게 아니라 더 더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9장에 보면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19:22)고 합니다. 부정한 문둥병자가 만지는 곳은 다 부정하게 되는 것처럼, 죄인인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엇을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하면 그 안에 또 다른 교묘한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 놓고 하는 말은 결국 우리는 괜찮은 사람들이야. 우리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우리 힘으로 한번 잘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서는 인간을 무어라고 합니까? 로마서 3장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9-18)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만약에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자기 스스로 의를 행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인정한다면 자기의 의나 자기의 선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세상의 가치관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세상을 바꿀만한 이야기라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에만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다시 19절부터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19-24)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제 세상에서 그동안 우리 한번 잘해보자고 한 모든 일들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들을 나도 좋아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창회도 하고, 계모임도 가고, 취미생활도 하고, 바르게살기운동도 하고, 구제도 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고 나니 다른 이름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나 동일하게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지만 너무나 목표와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어제까지 재미있게 사이좋게 지낸 가족과 친구가 갑자기 원수처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를 삼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 소속이 달라진 증거인 것입니다.

 

 

3. 달라진 소속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고 합니다. 우리의 소속이 달라진 것입니다. 어제까지 동지였는데 오늘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4-39)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슨 재미로 살아갑니까? 바로 자기 사랑하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 사랑도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되돌아올 때에야 하는 말입니다. 결국 사랑을 받아 내기 위해 사랑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남들이 자신이 사랑한 것만큼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으면 자신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인간들이 가진 자기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주님은 무엇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까? 가정을 파괴하러 오신 것입니다. 기존의 가정을 다 부수어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새 가정에 속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살고자 한 것이, 나를 사랑한 것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구나 하는 죄를 깨닫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가정과 이런 사람이 있는 단체에서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완전히 눈에 가시 같을 것입니다. 딱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스트레스 풀러 노래방이라는 곳을 자주 갑니다. 그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하는데 주로 부르는 노래가 무엇이겠습니까? 스트레스 풀릴만한 신나는 노래를 주로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봄 처녀비목과 같은 폼 나고, 무게 있는 가곡 같은 것을 부르면 무어라고 합니까? 분위가 망친다고 하며 쫓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아니 쫓아내지는 못해도 그 사람 언제가나 하며 눈치 덩어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세상에서 믿는 자들이 바로 세상에서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가정을 이루어도 종교단체를 만들어도 남을 돕자고 하여도 결국 자기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가 속한 단체를 미워하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온 자들을 세상이 어떻게 부르는 것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별종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부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들어야 할 우리의 이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쟁이라고 불려 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 과연 저들은 이상한 자들이다. 이렇게 재미난 세상에서 놀 생각은 안하고 항상 떠날 생각만 하며 살아라는 의미에서의 예수쟁이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더 악착같이 눈에 보이는 것과 땅에 집착하기에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를 돌아보며 우리 모두가 안디옥의 그리스도인처럼 참으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예수쟁이라 불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들과는 전혀 다른 목표와 가치관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며 또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는 시대와 상황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3.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란 무엇이며, 기독교가 그런 종교가 될 수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성경은 인간을 무엇이라 하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5.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소속이 달라짐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6. 인간의 사랑과 우리 주님의 사랑은 어떻게 다르며, 그런 세상에 주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7. 세상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의미는 어떤 뜻이라고 합니까?

8. 오늘날 예수쟁이라 불리는 우리가 점검하고 확인해야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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