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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으로 하는 참된 감사

본문 / 13: 7- 8

 

 

1. 절기에 대한 바른 이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성경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에서 행해지는 행사로 여기면 되는 문제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우신 절기에 속한 추수절과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다른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신 절기는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인간이 어떤 복을 누리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내용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도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모든 안식일과 절기들은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곡식을 거두고 또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기 위한 날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구약의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성취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왔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후의 오늘날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해 죄가 용서되고 또 그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음을 감사하는 것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약속의 땅에서 수고하여 곡식을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 자체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기 때문에 첫 열매는 인간의 노동으로 인한 대가가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한 열매임을 증거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에게 있어 맥추절은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인해서 맺어진 하나님의 나라, 즉 주안에 내가 사는 것이며 또 그 주안에 내가 거함으로 말미암은 모든 성령의 열매 또한 어린양 되신 주의 은혜가 됨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오늘날 맥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수고하여 일한 것을 연말에 거두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 또한 자신들이 수고하여 일은 하였지만 심고 거둘 수 있는 땅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어린양 희생 덕분이기에 자신들이 거두고 누린 모든 것이 어린양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추수감사절에서의 열매는 예수님의 피의 희생으로 구원에 이른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인해 모든 죄가 용서되고 생명의 누리고, 예수님을 나의 의로 누리게 된 자신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기의 참된 의미이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모든 절기는 사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절기와는 상관없이 다만 오늘날 교회에서의 행사로 여기며 또 그 의미만을 바르게 알고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절기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이 있기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생존은 물론 생명의 문제에서까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 하는 신자에게 있어서 감사는 당연한 본분이 아닐 수 없기에 비록 추수감사절이 교회 행사이긴 하지만 감사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 또한 유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참된 감사와 하나님의 뜻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적으로 보면 신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보면 신자가 하나님께 하는 참된 감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무엇을 근거로 하여 말씀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흔히 우리들 생각처럼 매주 하나님께 드려진 감사헌금이 줄었기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성도들이 교회 일에 헌신하지 않는 것이 근거가 되어 말씀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과 신자의 감사라는 것은 그러한 외적인 것들을 감사의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해야 하는 참된 감사는 그런 것들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런 감사는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참된 감사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그런 감사는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것들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감사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믿는 자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몸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 때문입니다. 신자에게서 표출되어야 할 감사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물론 대개의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부분일 수 있음을 아셔야만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해 감격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서 죄와 죽음을 감지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당연한 대가라는 것을 감지했을 때 나를 그 죽음에서 건져주신 그리스도의 구원에 감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희생을 발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 몸을 죽음에 내 던지고 대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감격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거나 혹은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늘 자신에게서 죽음을 감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어차피 죽어야 할 자니까 그냥 되는 대로 살자라며 세상에 대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가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신자는 염세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자신의 죽음을 감지했을 때 알게 되는 것은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주께 마음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5-6)고 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신자의 본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부르셔서 아들들이 되게 하신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일은 여기에 뜻을 두고 우리에게 행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어려움과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일들 그리고 잘못하고 잘했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들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안에서 바르게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답게 자기 몸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주어진 모든 것들이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서 죽음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자신에게서 죽음을 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감사가 사라졌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 드리자면 자기 죽음과 구원을 근거로 한 감사가 아닌 자기 몸을 근거로 한 감사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무거운 짐이 지워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때때로 무거운 짐이 지워지고, 그 짐을 지고 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해결하기 위해 신을 찾게 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향하게 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때를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이며 성경은 그것을 경건과 거룩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미혹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곰곰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갔던 사도들 중 어느 누가 과연 예수 믿으면 복 받고 형통한 삶을 산다는 말을 했습니까? 신약 성경에는 아예 형통이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는 형통이라는 단어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오직 자기 몸에만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싸움은 자기 몸이냐 아니면 신자의 본분이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본분은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겪는 세상에서의 어려움도 신자의 본문을 근거로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믿음을 본받으라

오늘 본분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7-8)고 합니다. 신자가 사도들의 믿음을 본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믿음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을 요구한 그들이 어떤 믿음의 길을 갔는가를 살핌으로써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삶을 살았던 그들과 함께 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주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보게 되면 오늘날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하시는 주님의 다스림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의 삶에서 공통적인 것은 세상이 말하는 형통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두가 고난의 길을 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자신이 한 일로 인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무익한 종으로만 존재했을 뿐입니다. 신자는 사도들의 이러한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은 우리를 이러한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믿음을 빌미로 형통을 기대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자신이 기대하는 형통한 삶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자의 감사는 형통한 삶과는 상관없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던 내가 하나님이 거저 베푸신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근거로 할 뿐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신뢰할 만한 것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며, 영원한 죽음에 갇힌 우리를 건지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러한 믿음에 무슨 보상이 있고 형통이 있겠습니까? 굳이 믿음으로 인한 보상과 형통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의로운 자라 여김 받는 것이 보상이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고 있는 것이 형통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을 빌미로 육신의 부족한 것을 더 채우고자 하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각일 뿐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구원으로 인한 진정한 감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늘 자기 몸에 대한 관심에만 집중한 채 복과 형통만을 추구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감사가 사라진 채 살아가는 오늘날 신자들의 삶의 실체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사도 바울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살펴 볼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러한 삶에 대한 불만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삶에서도 바울은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고 합니다. 오직 그의 마음은 교회를 위한 염려로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불평과 불만 그리고 분노와 짜증을 낼 수 있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그가 이런 사람 되게 한 것은 바로 복음의 가치와 존귀함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에 자신이 어떤 고난에 있든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염려로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을 본받기 위해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자신에게서 죽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고 구원의 감격과 함께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로 모였습니다. 말 그대로 감사절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려 합니까? 지난 한 해 동안 지키고 보호하고 또 내 가정과 가족들에게 별 사고 없이 지내게 하셨으니 감사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사업이 잘 돼서 감사한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감사한 것이겠지만, 그런 감사라면 만약에 우리에게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거나 또 사업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전혀 감사할 것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고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주 안에서의 바른 감사가 범사 가운데 가득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그런 감사의 고백을 믿음으로 주 앞에 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지키는 절기가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의 절기와 관계가 없는 뜻은 무엇입니까?

2. 유월절과 맥추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은 오늘날 어떤 의미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3. 오늘날 우리가 하는 감사와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른 감사는 어떻게 다릅니까?

4. 신자가 그리스도로의 구원으로 인한 감사와 감격은 무엇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까?

5. 우리 인생길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알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6. 오늘날 우리가 형통의 복음에 빠진 까닭과 오늘날 우리의 영적 싸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우리가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바르게 살필 필요성이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믿음으로 말미암은 보상과 형통을 굳이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사도 바울과 우리를 비교할 때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10. 오늘날 신자들의 믿음의 삶의 실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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