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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이사랴에서의 헤롯의 죽음

본문 / 12:19-25

 

 

1. 주를 따르는 목적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당시 이스라엘 땅을 통치하던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이자 유대인들이 기뻐하였고 이에 헤롯은 베드로마저 감옥에 가두었다가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탈옥시킨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보면 하나님은 이처럼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왜 자기의 종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옥에서 구출하기 전에 차라리 잡히지 않도록 도와주거나 또는 죽이려 할 때에 어떤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하셔서 충분히 종들을 살릴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과 권세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셔서 주의 종들이 주님의 일을 멋지게 이루어 내도록 하시면 되실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과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아직 바르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생각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도 잘 되어야지만 전도도 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런 생각이 수험생인 우리 자녀들에게도 네가 그렇게 교회 일만 열심히 하다가 대학에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고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공부해야 될 학생이 예배당에 모여서 찬양연습 한답시고 공부를 안 하며 세월 보내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걸 또 하나님의 영광 가린답시고 하지 못하게 하는 부모도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간직한 채 성경을 보며 또 자기의 영광과 세상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니 도대체 하나님의 영광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4)고 하십니다. 결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오죽 못났으면 자기를 믿지 못하고 남을 믿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정말 못난 자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면서 자기의 잘남을 증명 해보고자 한다면 이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이나 잘못 찾은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스데반이 순교하고 야고보가 순교하는 것보다 베드로처럼 멋지게 탈옥하는 것이 더 전도가 잘 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사건 이후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성경에서 한두 번 더 언급이 됩니다만 성경의 그 어떤 곳에서도 베드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영웅적이고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과 같고, 겨자씨 한 알과 같고, 가루 속에 들어 있는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고 사람들이 다 알도록 과시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귀하고,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증거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서 싫어하는 모습으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백성만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가 성경이 말씀하는 하늘의 신령한 복에 대한 것을 버리고 이 세상의 물질적인 복을 주는 곳으로 바뀌어 버리니 아무나 다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환난의 바람이 한번 불면 그런 자들은 다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많은 무리들이 주를 따르게 되자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6-27)고 하시며, 영생하도록 하는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 예수님이 자신임을 말씀하시며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고 하시자,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어렵다고 하면서 모두 다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의 이야기가 아닌 하늘의 이야기를 하자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을 목적으로 따르는 자들은 하늘의 이야기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의 환난은 극심한 어려움만이 환난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으로도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것 때문에 주를 따르는 자들은 보이는 세계에서는 주를 따르는 것 같지만 세상의 것을 따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 때문에 주를 따르지 못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이 좋아 진정으로 주를 따르지 못하게 되는 것 또한 주안에서 주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환난인 것입니다.

 

 

2. 세상 임금 헤롯의 최후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와 있건만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의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헤롯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발견하고자 합니다. 헤롯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야곱의 후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정치를 잘하였는지 로마의 인정을 받아 유대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다른 지역에 통치자를 보낼 때는 자기 나라의 관리자를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유대만은 헤롯을 통치자로 인정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네 명의 헤롯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태어났을 때에 두 살 이하의 아이를 죽이라고 한 것은 헤롯대왕입니다. 이 사람이 헤롯 왕가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입니다.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과 줄타기를 잘하여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늘 반란을 잘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막아낼 적임자로 인정하여 유대지역의 왕으로 임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에도 충성을 하여야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유대인의 왕이기에 유대인들의 환심도 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아사랴 도시도 건설한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가이사랴로 내려갔다는 이 도시는 헤롯 대왕이 시이저 황제를 기념하여 건설한 로마풍의 도시입니다. 우리 성경은 시이저를 번역할 때 가이사로 번역을 해서 가이사랴로 이름하고 있는 곳입니다. 두 번째 헤롯은 세례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세 번째 헤롯이고, 나중에 사도 바울을 재판하는 헤롯은 네 번째 헤롯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이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던 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12:19)고 합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찾아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파수꾼을 심문하여도 무언가 단서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헤롯이 천사가 밤에 베드로를 탈옥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몇 일전에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야고보를 칼로 죽인 헤롯입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면서도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권력과 쾌락에만 관심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헤롯왕이 주로 거처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을 대단히 노여워하고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가이사랴 지역보다 북쪽의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로서 이곳은 상업이 발달하여 돈은 많지만 양식이 부족한 곳으로 곡식을 사 먹어야 되는 입장입니다. 구약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 왕 히람에게 나무를 달라고 하면서 대신 밀과 기름을 주던 것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곳에 두로와 시돈의 지도자들이 헤롯에게로 나아왔습니다. 화친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헤롯의 왕국에서 나오는 곡식을 수입하지 않고서는 안 되기 때문에 헤롯에게 아부하러 온 것입니다. 헤롯도 이들이 밉지만 정치상 못이긴 채 하고 그들의 환영 행사장에 왕복을 입고 나간 것입니다. 헤롯이 그곳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크게 외치기를 이는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영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가 먹어 죽었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요, 학자요,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 보면 이 헤롯에 죽는 모습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헤롯에 온 몸에 병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고, 온 몸에 열이 나고, 피부에 참기 어려운 가려움 증세가 있고, 결장에 계속적인 통증이 있었고, 발에는 수종, 배에는 염증, 게다가 은밀한 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바람에 그곳에서 벌레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호흡이 곤란하여 똑 바로 앉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으며 온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겠습니까? 이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모두가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에 모두가 스스로 신이 되고, 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의 언약을 따라 자기의 원수를 정복하십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순간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에도 같은 모습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시하며 발로 밟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무시를 당하고 밟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여 아우성입니다. 힘을 달라고 그래서 세상에서 당당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물리적인 힘이란 결국 헤롯의 모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재림하기까지는 성도는 언제나 세상의 감추어진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야고보처럼 기적적으로 탈옥한 베드로도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주님의 일군들은 오늘도 이렇게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여진 모든 세력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헤롯이 교만하여 졌을 때 심판받는 것과 같이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낮은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좁을 길로 가지 않으려 하고, 십자가의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에서 왕이 되고자 합니다. 자기의 왕국을 만들어 호령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도 자기의 목소리 한번 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헤롯의 정신이고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가 헤롯의 모습에서 예외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스데반과 야고보의 모습을 실패로 보고 헤롯을 성공으로 보는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3. 우리의 삶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9-13)고 합니다. 사도들이 세상에서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사도들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믿고 따르며,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주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간 구약의 성도들은 어떠하였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고, 적을 물리치고 사자의 입을 막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도 이 세상은 항복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세상은 여전히 주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성도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성도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3:11-14)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영문 밖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살고 싶은 것입니까? 가이사랴 같은 곳, 즉 왕을 위해 만든 도시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가 왕인 나를 위한 도시이기를 원합니다. 로마 풍을 딴 신도시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즐기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하여 얼마나 줄타기를 잘 해야 하며,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어떻게 투자를 하는 것이 돈을 버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안에 다 헤롯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이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모습이 모든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정도 차이이지 모두가 헤롯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찬사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은 무어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신처럼 대접하려고 하였을 때 옷을 찢으면서 자기들이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울 놀라운 말씀은 오늘 본문에 헤롯이 이렇게 핍박을 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12:24)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런 모습으로 갈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받는 대로 영구한 도성을 더욱 사모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헤롯과 같이 살다가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오늘 말씀의 조명을 받고 삶의 방향을 바르게 정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필경은 멸망하는 길이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실패하고 망한 것 같아도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이러한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 비록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기쁨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도 만나지도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국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웅적이 아닌 싫어하는 방법으로 선포되어 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오늘날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어떤 것들이 있다고 합니까?

4. 오늘날 우리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자리는 무엇이며 또 그 자리의 결국은 어떠하다 합니까?

5. 헤롯의 정신과 사고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6. 하나님이 일하시는 십자가의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7. 우리가 살고 싶은 곳과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떻게 다릅니까?

8. 우리 모두가 헤롯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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