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4,348
오늘 : 124
어제 : 339

페이지뷰

전체 : 78,756,674
오늘 : 338
어제 : 1,15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

본문 / 13:13-31

 

 

1.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지난주에는 바울사도가 구브로섬 바보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곳에서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배를 타고 지금의 터키지역인 밤빌리아에 있는 항구도시인 버가로 이동하게 됩니다. 요한은 이곳에서 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 문제로 나중에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됩니다. 아마 가는 길이 너무 힘들고 험하여 바나바의 친척인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은 나중에 사도행전 15장에서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항구도시인 버가에서 내륙으로 좀 들어간 곳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안식일 날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이니 그곳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 날 회당에 모여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잠시 그 말씀에 대하여 말하는 기회를 줍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은 4장에서 보면 이런 기회를 얻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침 회당장이 내어온 성경이 이사야서의 말씀이었는데 예수님은 그 말씀 중에서 한 곳을 찾아 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읽으신 내용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고 하여 이사야서 61장의 이 말씀을 읽으시고는 회당의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도 지금 이러한 경우로 보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13:15)고 합니다. 그래서 시작되는 설교가 41절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설교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구원을 줄 수가 없고 오직 그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구약의 역사를 들어가면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바울이 옛날에 들었을 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런 설교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던 사람이고 이렇게 믿는 사람을 잡아서 옥에 가두는 일을 앞장서서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렇게 거부하던 그 내용을 그대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서가 증거하고 있던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사실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분노하여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때 바울 사도가 그 곁에 있으면서 스데반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돌에 맞아 죽을 그 설교를 바울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 베드로, 바울이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하였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여 죽이려고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 한 일은 모두 악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선한 일을 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실체를 알기에 그들이 아무리 열심과 헌신과 희생을 하여도 그것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정죄하고 나서는 것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은 방해만 하였기에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내셨다는 이야기가 성령 받은 자들의 설교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흥분할 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목숨 걸고 생명처럼 지켜 왔던 모든 전통들과 이력들을 전면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우리는 과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 행한 것 죄뿐이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자기의 행위를 부정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 우리는 매사에 불평과 원망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 불평과 원망의 말의 거의 전부가 모두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들뿐입니다. 나는 틀리고 당신이 옳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못합니다.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불평과 원망이 자기 정당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하자면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의 설교를 들으면 철저하게 자기의 의를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성령이 임한 자의 설교를 동일하게 성령이 임한 자가 그런 듣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한 것이 다 더러운 것임을 처절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는 부인 되고 오직 주님께서 주신 의만 사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2-4)고 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면 쓸수록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목표점과는 더 멀리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2. 바울의 설교 1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의 설교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17절부터 보면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13:17-22)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 중심에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된 그들을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독립운동 하여서 출애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용사가 되셔서 싸우신 결과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얼마나 자주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러한 소행을 참으셨다고 합니다. 그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고 그 땅을 주셨습니다. 사사시대 약 사백 오십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였습니다. 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왕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사무엘을 통하여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워진 왕이 사울입니다. 그러나 이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어떤 자입니까? 우리는 다윗이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겼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평소에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주어도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세상의 학문이나 교회에서 설교나 간에 결국은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긍정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마음에 들게 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아들도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만 한다면 얼마든지 복을 받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이치에 맞는 말 같습니까?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니 사람들이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자기들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합한 분이신데 사람들의 마음에 도대체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여 기름을 붇기 위하여 제사에 초대하였습니다. 누구에게 기름을 부어야 할지는 사무엘도 모릅니다. 그래서 첫 아들을 보니 용모가 준수하고 힘과 능력이 있어 보여서 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는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니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은 그 중심이 제대로 된 사람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이라도 인간의 선행조건이 있어서 쓰임 받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다윗을 세우시는 것이겠습니까? 다윗은 형제들이 다 참여하는 제사에 참여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새도 형제들도 다윗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양떼나 돌보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가 봐도 아니라 여겨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사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은 다윗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 사고방식이란 바로 힘의 체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 있는 왕을 구하여 하나님께 매일 매달리지 말고 우리 일은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하자는 것이 사울을 구한 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아직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순수하고 착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힘을 원하는 세대에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3. 바울의 설교 2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왜 막았겠습니까? 힘이 안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씨에서 나오시는 구주란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긍정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마저 예수님께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자기는 그분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과연 메시아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을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4-6)고 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예수 믿으면 병 고침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 내용은 인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기에 전적으로 외부에서 구원하여 주어야 하는 상황이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31:7-9)고 합니다. 돌아오는 자들을 묘사하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자기 힘으로 바벨론에서 유다까지 오기에 힘든 자들입니다. 그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돌아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로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셔야만 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는 자들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이것은 외형이 아닌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스스로 자기의 심령을 가난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비록 여건이 좋지 않으면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기를 포장하고 자기를 높여 보이고 싶은 것이 본능이기에 나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니 도와주세요.’ 하는 것이 죽기보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상대방이 엄청난 능력과 힘이 있을 경우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잠시 엎드리더라도 내가 자존심을 꺾고 엎드린 것보다 더 나은 대가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엎드려 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것입니다.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습니다. 그러니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보통 인생보다 더 상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좋은 배경도 없습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어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러한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빌겠습니까?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13:26-27)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말씀을 보내셨는데 그 구원의 말씀이 사람들이 평소에 선호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마다 율법과 선지서를 읽고 외우기까지 하였지만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정죄한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선지자들의 말이 응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여론으로 몰아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 것이라고 사도들이 증거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설교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행한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정죄하고 죽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인간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의 설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서 화가 나는 자도 있겠지만,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직도 여전히 자기 의가 충만한 자입니까? 아니면 오직 주의 의만 바라는 자입니까? 오늘 말씀 앞에 우리를 두어 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주의 의만을 나의 의로 삼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2.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우리에게 불평과 원망의 근거와 성령의 사람들이 하는 설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4. 인간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설교의 내용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5. 하나님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하여 다윗을 세움으로 보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6. 유대인과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답변으로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7. 예레미아서에 나타난 구원 받은 자들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8. 스데반과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가 어떠하다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37 4월 26일 / 사도행전65. (행20:1-12)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나타난 하늘의 위로 관리자 2015.04.25 785
236 4월 19일 / 사도행전64. (행19:21-41) 복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소동 관리자 2015.04.18 557
235 4월 12일 / 사도행전63. (행19:8-20) 복음으로 인해 따로 세워진제자들 관리자 2015.04.11 416
234 4월 5일 / 부활주일 / 에스겔 37:1-14 골짜기에서 살아난 마른 뼈와 부활 신앙 관리자 2015.04.04 803
233 3월 29일 / 사도행전62. (행19:1-7)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관리자 2015.03.28 611
232 3월 22일 / 사도행전61. (행18:18-28)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관리자 2015.03.21 545
231 3월 15일 / 사도행전60. (행18:1-11) 내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심 관리자 2015.03.14 510
230 3월 8일 / 사도행전59. (행17:16-34) 인간의 철학과 하나님의 복음 관리자 2015.03.07 463
229 3월 1일 / 사도행전58. (행17:1-15) 다른 임금을 믿고 사는 자들 관리자 2015.02.28 405
228 2월 22일 / 사도행전57. (행16:25-34)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관리자 2015.02.17 826
227 2월 15일 / 사도행전56. (행16:6-15) 성령의인도함으로 나타나는 두 모습 관리자 2015.02.14 586
226 2월 8일 / 사도행전55.(행16:1-5) 주를 위한 바울의 자기 부인 관리자 2015.02.08 511
225 2월 1일 / 사도행전54. (행15:22-29) 짐 지우지 말고 구원을 받게 하라 관리자 2015.01.31 532
224 1월 25일/ 사도행전53. (행15:1-21)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로 믿노라 관리자 2015.01.31 519
223 1월 18일 / 사도행전52. (행14:19-28)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필요한 환난 관리자 2015.01.17 623
222 1월 11일 / 사도행전51. (행14:8-18) 구원 얻을 만한 믿음과 우상숭배의 믿음 관리자 2015.01.10 487
221 2015년 1월 4일 / 사도행전50. (행14:1-7) 두 사도를 따르는 자와 유대인을 따르는 자 관리자 2015.01.03 507
220 12월 28일 / 사도행전49 (행13:42-52)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관리자 2014.12.27 660
219 12월 21일 / 사도행전48. (행13:32-42)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 믿어짐 관리자 2014.12.20 650
» 12월 14일 / 사도행전47. (행13:13-31)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 관리자 2014.12.13 714
Board Pagination Prev 1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