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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원 얻을 만한 믿음과 우상 숭배의 믿음

본문 / 14: 8-18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자 도망을 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것은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며, 기쁜 소식인데 왜 사람들은 환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 안에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고 도망을 가야하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바른 복음을 받고 믿는다는 것은 그 당시 바울이 받았던 핍박과 고난 속으로 함께 들어간다고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고니온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들어갑니다. 이곳에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바울사도가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니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는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고 하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내용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구원 얻을 믿음

오늘 본문에 보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자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입니까? 앉은뱅이가 믿음이 좋아서 일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바울 사도가 능력이 많아서 일으킨 것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 어느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언제나 성경은 사람의 능력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앉은뱅이의 믿음도 아니요, 바울의 능력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이신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함으로서 과연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날 때부터 앉은뱅이요,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모델이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이 자기들은 의롭고 온전하다고 여긴 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그런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한 창기와 세리와 같은 죄인들은 주님 앞에 도리어 의롭다 함을 받는 사건과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성전 미문에 있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가 일으키는 사건 후에 하는 말씀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사도들을 주목하여 보게 되고 이에 베드로가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이 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란 주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란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또한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오직 주 예수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에베소서 2장의 말씀처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믿음이나 구원이 아니기에 아무도 자랑치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한다고 하여도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하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들이 이고니온 사람들에게 여실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본능과 속성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을 잘 믿을 텐데,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자 진리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적 일으킨 사람을 신으로 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교인들은 목사를 기적을 일으켜 주는 능력 있는 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닥치는 재앙들은 물리치고, 복을 불러다 주는 그런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종교를 가지려하고 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여 무슨 복 받는 비결을 말해 주는 사람 즉, 교주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든, 절에 가든 자기를 사랑해서 가는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정성을 바쳐도 또는 봉사를 하고 구제를 해도 자기를 사랑하여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을 바쳐도 별 효력이 없으면 그 신에게 불평과 불만을 내 놓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에게 이런 저런 복을 안주면 재미없다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세상에서 조그마한 신기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처럼 자신을 신격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교주의 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종사하는 자들은 되도록이면 자신을 신비화시키려고 합니다. 무언가 보통 사람들보다 다른 몸짓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복장과 행동 그리고 말투와 걸음걸이조차 다른 분위기가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바울과 바나바를 보시기 바랍니다.

 

 

2. 우리도 사람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그곳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섬기려고 합니다. 바울은 말을 하니까 헤르메스라 하고,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합니다. 그리스 최고의 신이 제우스인데 아마 바나바는 의젓하게 뒤에 서 있고 바울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니 의젓한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은 제우스의 전령과 같은 역할로 보이니 헤르메스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을 가지고 와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금만 무게 잡고, 폼 잡고 있어도 신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바로 자신들의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들어가서 소리 질러 외칩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4:15-17)고 합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정말 간신히 뜯어 말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으로 섬기려고 하는 자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결국에 자기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신과 같은 자들이 아님을 알게 되자 나중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그냥 묵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 때는 환영하다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자 모두가 돌아서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고, 주의 이름만 부르면 무엇이나 해결이 되고, 승리하고, 행복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핍박받고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움에 갇혀 있기에 그 어두움 가운데 빛을 받은 자가 가면 싫어하는 것이 당연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과 전혀 구별됨이 없이 아니 오히려 세상과 더 잘 어울려 살며 그래서 세상이 너무 좋아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연기되었으면 하는 상태가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 것은 잘못된 하나님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헛된 믿음과 잘못된 일에서 돌이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잘못된 신을 섬기는 자리에서 돌이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교적인 관념의 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는 묵인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복음이 증거 되는 지금은 돌이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 참 하나님

다시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14:16-17)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자기를 증거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증거 하신 것입니까?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그 결과 음식과 기쁨이 주어져서 우리의 마음이 만족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과연 믿느냐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비를 내리셔서 곡식이 자라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도 의인에게도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는 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나은 힘과 능력만을 원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생각해도 자기에게 힘을 보태어 주는 하나님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특별하게 다른 사람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런 신의 사랑 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마다 서로 신에게 잘 보이기 경쟁이 들어간 것입니다. 열심히 해도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른 하나님의 열심히 아닌 오직 자기 열심히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 얻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바친 열심만큼 복을 받으리라는 생각이 바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3-25)고 합니다. 인간의 종교성이란 것은, 신에게 잘 보여야 자기가 복 받고 잘 살게 된다고 여기는데 혹시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신이 있어서 그에게 섭섭하게 대접하게 되면 혹시라도 자신을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하는 제단도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름은 모르지만 신이 있다면 섭섭해 하지 마시고 이곳에 와서 얻어먹으시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지킨다는 주일이나, 절기들이 이런 모양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는 안식일과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일과 절기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골로새서 2장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고 합니다. 한마디로 안식일이나 절기는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그림자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에서 지키라고 하지도 않는 주일과 절기들을 만들어 지키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이만큼의 정성과 열심을 보이고 또 감사헌금도 하였으니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달라고, 자신이 원하는 그 복을 내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자신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이 원하는 신이 아니라고 하자 결국 사도들을 유대인들이 죽이려할 때 그냥 묵인하는 모습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오늘 본문의 그들처럼 오직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위하여서만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분명한 증거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17:30-31)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렇게 살아도 그대로 내 버려두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세운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고 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심판의 날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기에 이제 그 사실을 믿는다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의 최고의 기적 중의 기적은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임을 알아 감사가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전의 인간의 욕심은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신앙의 본질적인 욕심은 우리의 본분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분을 잊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까지도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믿음은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늘에 앉힌바 되었고 또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라면 우리의 가치관은 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런 우리의 신분을 잊지 마시고 살면서 오직 그 믿음으로 주를 고백하는 삶이 얼마나 큰 기적가운데 사는 자들인가를 인식하며 감사하며 사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과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본문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3.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을 가진 자들의 특징은 어떤 것입니까?

4. 종교적인 본성을 가진 인간들의 생각과 그들의 목적과 기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바울이 자신들을 신과 같이 여기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까닭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바울의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7. 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증거 하심과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의 대한 기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우리가 만든 종교성적인 신앙과 이제는 주께로 돌이켜야 하는 근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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