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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필요한 환난

본문 / 14:19-28

 

 

예전에 교회학교 부르던 노래 중에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여기 가사에 모든 내용을 대신 넣어도 다 되는 찬양입니다. 정말로 복음적인 찬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듭나고 믿음으로 간다는 이 내용도 나의 신념이나 의지적인 결단이 아니라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2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14:22)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이 반드시 있어야함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는 환난을 피하기 위함인데 오늘 말씀처럼 오히려 환난이 온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것도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좋지만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내용의 말씀들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1:5)고 합니다. 성도가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견디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세워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흔히 말하는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 고난이 성도가 성도다워지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1장에도 보면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거나 또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바 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증거 하는데 핍박이 오고, 환난이 오고, 고난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은 세 가지로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고난의 역할

첫째로, 고난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 1장식으로 말씀드리면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자 사람들이 어두움을 사랑하기에 빛을 미워하고 싫어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누가 빛인지 어두움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참 빛 곧 우리의 생명 되시는 분이 오시니 이 세상의 사람들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자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합동으로 뭉쳐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세상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증거물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려 왔습니다. 성경에서 증거하고 예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자 배척하는 것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병을 고쳐주고, 떡을 주는 것은 좋은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은 싫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시는 메시아가 싫었기에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당시 유대인들처럼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은 워낙 포장기술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속고 있지만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설교하고 전도한다면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만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귀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있는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핍박과 환난이 따르게 되어 있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도 동일한 핍박이 임하는 것입니다.

 

 

2. 예원의 성취

둘째로, 고난은 이미 예언된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세상에서 그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들에게도 당연히 핍박이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복음도 누가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행전이라고 하여 함께 보는 것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에서 예언된 대로, 즉 예수님의 하신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방식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2-19)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말이란 메시아의 오심으로 종말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종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핍박과 회당과 옥에 넘겨주고 임금들과 관장 앞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형제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몇을 죽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누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바울사도입니다.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받는 자도 있었지만 그러나 반대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고 강경하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하여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이고니온에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하자 루스드라로 갑니다.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신이라고 하면서 루스드라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하자 겨우 말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와서 루스드라에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신이라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그런 기적과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주고자 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니 루스드라 사람들도 바울에게서 돌아섰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였기에 그 성에서 바울을 돌로 치는데도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준다면 부처도 공자도 예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가 되고, 우리 집안과 나라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배척하겠다는 것이 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우리나라가 많은 나라에 선교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증거 되어야 할 복음보다는 구제 사업에 주력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면서 복음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지하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데도 달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돌아보아야 할 큰 음성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기절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다 버립니다. 그러자 바울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이 그 곁에 둘러 서있었는데 죽을 줄 알았던 바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음날 더베로 가서 또 복음을 전하고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갑니다. 왜 돌로 쳐 죽이려하는 곳으로 다시 가는 것입니까?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고 온 지역으로 다시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2절부터 보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14:22-23)라고 합니다. 비록 바울을 돌려 쳐서 죽이려고 하는 곳이지만, 가면 다시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는 곳이지만 그러나 그곳에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핍박한 곳이라면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당연히 핍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가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며 금식기도하며 주님께 부탁합니다. 방금 돌에 맞아서 죽었다고 버려진 그 성으로 또다시 들어가는 바울이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미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6-19)고 합니다.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데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돌에 맞았을 때 피도 나지 않고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지 않고 보호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몸을 죽여도 영혼을 어찌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의 성취를 보는 것입니다. 누가 핍박이 두렵지 않고 매 맞는 것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환난과 핍박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매 맞으면서 환난 당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고난의 신앙 길인 것입니다.

 

 

3. 성도의 소망

셋째로,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소망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좋아서 환난을 당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 적으로 좀 이상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로 부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1-4)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환난을 당하거나 고생을 하거나 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리에서 화평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다 얻었는데 3절에서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왜 환난을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여도 평소에는 늘 하늘에 소망보다는 눈에 보이는 소망을 더 좋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심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소망을 분명하게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병을 앓게 되면 공부보다 건강하기만 하여도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초등학생들 까지도 공부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벌어지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공부가 제일인줄 알고 공부만 하라고 하던 부모가 그렇게 자식을 잃게 되는 환난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부가 다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애들이라도 그렇게 키우지 않으려고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성도에게 환난이 오는 이유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그리고 삶의 목표와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사랑의 간섭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자들은 반드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이 우리의 옛 습성이 잠시 있다가 없어질 신기루 같은 것들에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의 손길로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만 소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성경은 환난도 고난도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환난이나 고난은 그냥 환난이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들이 우리에게 소망과 자람을 선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의 삶 가운데서 하늘을 바라보는 성도라면 환난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나를 붙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더욱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믿음과 시각으로 주님만 바라보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종교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오늘 말씀과 같은 내용이 싫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믿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합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전도란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까?

4. 이 세상은 무엇을 기대하며 그런 세상의 모습과 현실이 어떠하다고 합니까?

5. 사도 바울이 자신을 핍박하던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고난의 신앙 길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7. 주로 말미암아 화평과 은혜의 자리에 있음에도 환난이 있어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께서 자녀로서 환난을 만나는 우리들의 시각은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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