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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를 위한 바울의 자기 부인

본문 / 16: 1- 5

 

 

1. 신앙과 성격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면 따분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자세가 되면 잠밖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니는 회사의 노사회의에서 구조조정이나 임금협상의 결정이 어떻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내가 사 놓은 주식이나, 땅 값이 어떻게 되었다든가 하면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현실감이 없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이야기는 현실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성경 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하는 미련한 모습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현실이란 하나님의 말씀이지 변화무쌍한 이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이란 새것이 없습니다. 연말이 되고, 새해를 준비한다고 하여도 이미 해 아래는 새것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이미 다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허무한 것들입니다. 옛날에도 그런 것들을 그 순간에는 새롭게 느꼈겠지만 그 순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 또한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들이었음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고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일들이라는 것이 다 풀과 같고,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풀이 시들면 꽃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 개인의 일이며 동시에 모든 인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방인이 할례를 행하거나 또는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확정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이방의 풍습들 중에 몇 가지를 금하게 하고서 다른 짐을 지우지 말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가지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15:30-35)고 합니다. 안디옥에 와서 성도들을 모아놓고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전하자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36절부터 보면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15:36-41)고 합니다. 수일 후에 바울사도가 바나바에게 전도여행을 할 것을 제안합니다. 전에 복음전한 곳으로 다시 방문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합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중도에서 바울을 따르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고 갈라서 버립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바울을 꺼려하였는데 그때는 바나바가 천거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갈라서 버린 것입니다. 바나바는 온유한 편이고, 바울 사도는 아주 열정적인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중도에 포기하는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고서는 실라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들의 갈라서는 것은 진리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바울사도가 마가를 불러서 다시 동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일 후부터는 주된 사역의 일선에는 바울이 드러나고, 바나바는 조용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성격의 문제를 잠시 짚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면 성격이 바뀌는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사람은 자기 성격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격을 죽여야 된다고 말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를 보면, 불같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자기를 지금까지 인도하여준 바나바와 대판 싸우고 헤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마구 책망하기도 합니다. 하늘같은 선배며 흔히 수제자라고 일컫는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그런 성격처럼 주님의 사역도 열심히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가장 많이 부딪히는 부분이 바로 이와 같은 성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급하고, 어떤 사람은 천하태평입니다. 어떤 사람은 속에 담아두는데, 어떤 사람은 도저히 담아두지를 못합니다.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가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겨울에는 겨울대로 온풍기, 에어콘을 조절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스스로 알아서 자리를 조절하여 앉으면 될 텐데 무슨 지정석처럼 꼭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불평과 원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불같은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5-7)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한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하나도 걸리지 않겠습니까? 아니, 많이 걸릴 것입니다. 성내지 아니하고 하고서도 자신은 얼마나 성을 내었습니까? 진리에 관한 문제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자기가 완벽하게 지켰기에 기록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 자신도 이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고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란 결국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신앙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16:1-5)고 합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입니다.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러 거기서 디모데를 만납니다.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인데 결혼을 헬라인과 하였습니다. 유대여자이지만 이방인과 결혼하여 디모데를 낳았는데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바울이 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할례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이방인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정하였는데 왜 다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이 겁이 나서 그랬을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이미 1차전도 여행 때에 자기의 목숨까지도 돌보지 않았던 바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할례를 행하게 하였을까요?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디모데의 부친이 이방인인줄 그 지역의 유대인들이 다 알기에 만약 디모데가 복음을 전한다면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는 것은 할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거나 안하거나 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모습입니다. 할례가 아니라고 그렇게 싸운 사람이 할례를 행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는 결코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2:1-5)고 합니다. 여기 보면 디모데와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지역에서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고, 정작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디도에게는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할례를 행하지 않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 까닭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엿보고 다시 종이 되게 하는 일에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이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할례를 행하는 경우고 있고, 안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가 사는 것을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자유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한 자 앞에서는 함께 약한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 신앙

그런데 우리는 약한 자 앞에서 강한 척 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못하느냐며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약하면서도 약하지 않은 척 하면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우리가 가진 신앙 지식과 또는 신앙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아의 껍질을 두껍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의 약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세이며, 약함을 드러낼 때 함께 약하여지지 않고 자기는 강한 것처럼 하는 것도 역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살리려고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런 우리의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사람 눈치 보아야 하고, 나의 자존심 챙겨야 하고, 나중에 자존심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장래도 철저하게 대비하여야만 하니, 참으로 피곤한 삶을 스스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그런 우리와는 달리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합니다. 날마다 죽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면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여러 사람을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도 복음에 참예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목표와 방향이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혹 나는 평신도인데 무슨 그런 삶이 필요하겠나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도도 평신도이고, 평신도도 사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를 믿는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와 같은 생각이라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또 성격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배 참석도 겨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보도 아까워서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획일적으로 이렇게 하라고 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율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임을 알고 믿는다면 각자에게 주의 성령이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며 살게 하실지 알게 하시고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본질은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 적인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내 고집과 성격을 따라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할 순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비본질적인 것을 사수하다가 본질을 놓치는 신앙의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더 많은 자들을 얻고자,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를 향해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주를 향한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모습 그대로 또 이 신앙 그대로 주 앞에 늘 아름답고 존귀한 자로 세워져 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른 복음 전도의 길로 갈라서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두 사람의 갈라섬은 어떤 문제라고 하며, 오늘날 우리들이 만나는 유사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3. 바울은 자신이 전한 말씀 앞에서 무엇을 발견했고 그래서 어떠한 삶을 살게 됩니까?

4.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는 달리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온 피곤한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7. 바울 사도가 여러 사람 앞에서 여러 모양으로 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신앙 안에서의 어리석음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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