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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의 인도함으로 나타나는 두 모습

본문 / 16: 6-15

 

 

1. 주의 인도

우리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은혜로 믿게 되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내 힘으로, 내 책임으로 자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에 강조점을 둡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임하심은 예수님만 믿게 하시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세상 끝날까지 성령께서 친히 동행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예수 믿는 것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면 이제는 너희가 알아서 천국까지 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아예 성도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고 떠나시지 아니하시며 늘 인도하시고 간섭하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바울사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셋째 하늘까지 갔다 온 사람입니다(고후12:2). 하나님의 계시를 얼마나 엄청나게 받았는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까지 줄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도입니다. 그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친히 계시를 받은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전한 복음을 부인하는 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자신 있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사도가 이제 2차전도 여행을 아시아 쪽으로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시아 쪽이란 중국과 한국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 사도가 아무리 애를 써도 길이 열리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밤에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로 알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갑니다. 마게도냐는 지금의 그리스 지역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유럽으로 먼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주의 놀라운 계시를 받은 바울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놀라운 계획과 뜻을 세운 바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오직 주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유럽을 지나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지금 우리에게도 복음이 증거된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바울사도의 헌신이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엄청난 계시를 받았다고 하여도 역시 인도하심과 이끄심과 쓰시는 것은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욕망과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날 도와 주시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물질만 주시면 하나님께 내가 이것도 저것도 해 드릴 텐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능력 그리고 우리가 가진 주를 향한 놀라운 계획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울과 같이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2. 영접하는 자, 핍박하는 자

바울사도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드디어 마게도냐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적어도 이런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갔다면 준비된 영혼들이 수십,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적어도 천지를 만드신 주님의 사도로서 인도함 받아 가는 것이라면 조그마한 나라 대통령 후보가 가는 것 보다 못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요, 만물의 통치자이신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그래야 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의 대통령도 아닌 단지 대통령 후보가 연설을 하기 위해 다닐 때도 그 비서들이 분초를 따져가며 준비하여 놓습니다. 어떤 장소에서는 몇 분간 연설하고, 분위기는 어떻게 띄우고 하는 것을 다 준비하여 놓습니다. 그래서 후보자는 그냥 가서 연설만 하면 되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는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11절부터 보면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16:11-13)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마게도냐 지경 첫 성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인데 누구 하나 영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당시 복음을 증거 하는 방식은 어느 곳에 가든지 일차적으로 그곳에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 곳을 찾아 갑니다. 안식일에는 회당에 유대인들이 모이기에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로 회당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성에서 며칠을 유하면서 어디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강가로 나가보니 그곳에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합니다. 유대교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란 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먼저 유혹받아 범죄 하였다고 하여 늘 여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였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세상 적으로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또 가루 속에 숨겨진 누룩처럼 그리고 한 알의 썩는 밀알처럼 그렇게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루디아라는 옷감을 만들어 팔고 하는 여자의 마음을 주님께서 여셨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증거 하여도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여셔야만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 같이 말씀을 듣지만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나 잘해라, 하면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자 바울이 전하는 말을 청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루디아가 주님을 영접하자 루디아 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로 보건데 루디아는 부요한 독신 여인으로 가내공업을 하는 주인으로 보여 집니다. 고대의 대가족은 생활공동체이면서 생업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종교공동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함께 살펴보았던 고넬료의 가정도 그리 하였고 또 오늘 뒤에 등장하는 간수의 가정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가장이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누가 뭐라 해도 아버지가 그 집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누가 가장이 되어 있습니까? 경제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가장입니다. 그러니 말세인 것입니다. 아무도 가장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가장이 예수를 믿고서 믿음으로 살자고 하면 당신이나 그렇게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 요즈음의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아버지들이 또는 남편들이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예수를 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마게도냐까지 왔지만 며칠 만에 겨우 예수 믿는 여자 한사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유럽의 최초의 신자요 그리고 그곳이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초대교회는 거의 다 개인의 가정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영접한 루디아가 바울과 복음 전하는 자의 일행을 언제 보았다고 자기의 집에 강권하여 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16:15)고 합니다. 여기 보면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이 실라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일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고, 이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것이기에 누가 자신도 이 일행 가운데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법 일행이 되었을 것이고 또 이곳에 유하게 되면 계속 사람들이 모이게 될 텐데도 루디아가 강권하여 자기 집에 머물라고 합니다. 방도 내어 주어야 할 것이고, 식사도 제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여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복음의 가치를 인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강권함이 무어라고 합니까?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합니다. 만약 그 집에 들어가 유하지 아니하려면 나를 예수 믿지 않는 자로 여기는 것으로 알겠다고 할 정도로 강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전혀 반대되는 상황도 나옵니다. 성령의 인도라고 하여서 화려한 영접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겨우 여자 한 사람이 영접을 하였습니다. 그곳을 기지로 삼아 그 도시에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중에 어떤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일행을 따라 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 여종은 귀신의 힘으로 점을 쳐주고서 주인에게 이익을 주는 그런 여종입니다. 귀신 들린 이 여종이 무어라고 하면서 따라다니는 것입니까? 나쁜 말로 욕하면서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6:17)고 합니다. 나쁜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는 것은 어찌 보면 좋은 말이지 않습니까? 귀신이 알아보고 이렇게 높여준다면 대단한 효과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초점이 바울에게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6:18)고 하여 그 여종에게 있던 귀신을 쫓아 내어버립니다. 그러자 그 일로 말미암아 그 종의 주인들이 자기 이익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시장거리고 관원들에게 끌어가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로마 사람들인 우리가 받지도 못할 풍습을 전한다고 하면서 고발합니다. 그러자 재판도 열지 않고,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하여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마게도냐까지 왔는데 겨우 여자 한사람 영접하여 이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중에 귀신 들린 여종 고쳐놓고서 매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3. 귀신 들린 자

여기서 극명한 두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바울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하게 하는데 반해 다른 한 사람은 단지 자기의 이익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귀신들린 여종이 온전하게 된 것은 상관없이 바울과 실라를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이익이 끊어지는 것이 귀신에 들린 자가 고침을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 이 세상이 귀신들린 세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방향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돈을 믿지 않고, 자기의 생활능력을 믿지 않고 사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의 사는 모습입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월급 주는 것 믿지 않고 살고, 성도들은 다니는 직장 믿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기 좋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시듯이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오듯이 이처럼 구원이란 방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나 이렇게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과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기에 배척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하여 있습니까? 루디아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여종에게 있었던 귀신이 떠나버리자 자신들의 이익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사람들과 같습니까?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까?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에게 있었던 귀신들을 이천여 마리가 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허락하사 돼지들이 호수에 빠져 죽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 일 후에 그 동네 사람들이 와서 살펴보고 하는 말이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8:36-39)고 합니다. 37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와서 손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돼지 떼가 몰사하였으니 저 예수를 모셨다가 무슨 손해를 더 볼지 모르니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영을 받은 바울 사도도 똑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익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귀신에 들려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복음보다 돈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나 성령의 인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울 사도를 옥에 가두어 두었지만 그 감옥에도 구원받을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 중에 감옥의 문들이 다 열린 것입니다. 간수가 자결하려고 하자 바울과 실라가 우리가 여기 있으니 자결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결하여야 하는 순간임을 아는 사람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런 성령의 인도함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실패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주 예수를 믿으시고 또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복 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성숙한 자로 세워지는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

2. 바울 사도와 오늘날 우리의 사역 가운데 같은 것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간 바울의 사역은 어떠하였으며 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4. 당시와 오늘의 가정이 어떻게 다르며, 우리의 가정에서 점검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루디아에게 나타난 성령의 인도함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 말씀에서 지금 세상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이야기 합니까?

7. 오늘 말씀에서 구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8. 성령의 인도함이 우리 눈에 보여 지는 모습과 또 주 안에서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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