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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간의 철학과 하나님의 복음

본문 / 17:16-34

 

 

1. 내가 믿는 예수

매주 이 시간이 되면 우리나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다들 예배를 한다고 모여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마다 믿는 예수님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목사가 말하는 예수가 다르고, 집사가 말하는 예수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다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생각하고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또 성경을 안다고 하여도 자기가 알고 좋아하는 예수만을 원하고 있다면 이것은 정말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처럼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를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본다고 해도 성경을 제대로 아는 것 또한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선입견이라는 것이 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철학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어려운 학문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철학을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내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철학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고, 신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신을 섬긴다고 하더라고 결국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철학의 발원지가 되는 아덴(아테네)에는 신상과 영웅들의 상이 가득하고 신전이 가득한 것입니다. 신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신들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자기들이 소원하는 바를 얻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신상과 신전을 만들어 신을 섬기는데 혹시 자기들이 아직도 잘 알지 못하는 신이 있어서 자기들에게 화를 주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신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신들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러한 아덴(아테네)에 들어가 보고서는 분이 가득하였습니다.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덴에서도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변론하고 또 광장에서는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변론하는 목적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변론을 위한 변론은 무익합니다. 성경에서는 유대인들과의 변론은 자주 언급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부활하셨다, 그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방인들에게 변론을 통하여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증거 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영생이란 요한복음 17장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17:3)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가 과연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인가 아니면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철학적인 예수인가를 구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참신과 거짓 신

오늘 본문에 보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철학의 주제들은 완전한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절대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는 이들의 도시에 온갖 우상과 신전들이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진리를 찾아낸 결론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철학과 과학의 이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칸트라는 사람이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말하였습니다. 초월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손을 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관심사가 실존적인 문제만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마저 무너져 내린 것이 바로 세계 제2차 대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대가 무너진 사람들이 신에게로 돌아 왔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미국의 9.11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평화로워지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란 것이 나의 필요에 의하여 찾아지고, 섬기게 되는 것이라면 결국 인간은 여전히 주인이요 주체로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특징 중에 자기들의 이론이 맞는다는 고집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집들이 전문적인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무리 있는 그대로 증거 하여도 꼭 끝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만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하 그렇구나!” 하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오랜 시간 성경을 근거로 복음을 전하여도 그렇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하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값없이 또는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이 주어지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종교라든가, 신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주인인 것입니다. 겨울에 연을 날릴 때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연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연 날리는 사람이 다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줄을 감았다가 풀었다가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것은 모두 다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신까지도 움직이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신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만큼 신이 감동하여 나에게 복을 더 주시겠지, 설마 이정도로 내가 헌신하는데 가만히 있겠나, 지성이면 감천이지,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종교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이 팽배한 아테네 도시에 오히려 온갖 신전과 신상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복음과 정 반대입니다. 철학이란 철저하게 인간의 주체와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자신 모두가 철학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철학이나 학문이나 종교라는 것이 모두 인간의 창작물이며 결국에는 자기들이 스스로 주인이요, 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가능이란 없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사상들이 모두 인간의 능력을 믿음으로 나오는 사상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이러한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고발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최고의 사상으로 나타낸 것들이 모두 우상이요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생각한 진리나 종교나 신이나 간에 모두가 자기를 위하는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복음이란 얼마나 낯설고 생소한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이들에게 내가 참된 신을 소개하겠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22절부터 3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러므로 온갖 신을 다 섬기고 있는데 그 중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단도 보았는데 너희가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을 내가 바르게 알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를 수십 년 믿어 왔다고 하지만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나를 세우거나 또 그 말씀으로 내가 부딪히지 아니하면 어느새 내 안에는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신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9-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뽑히고, 파괴당하고, 파멸되고, 넘어 뜨려지고 나서 건설하며 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얼마나 나의 고정된 하나님과 예수님이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 찬 우상 하나님과 우상 예수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말씀으로 날마다 뽑히고, 파괴당하고, 부수어지고 또 날마다 다시 건설되고 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안에도 날마다 철학과 종교로 위장된 우상이 들어앉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믿고 있다는 하나님,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정말 사도들이 증거 하는 분과 일치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부터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4-25)고 합니다. 사람들이 신을 위한다고 하는 것은 신을 이용하기 위하여서이지 정말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왜 인간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서 신전을 지어 바치겠습니까? 신을 사랑하여 섬기기 위함이 아니라 결국 그 신을 기쁘게 함으로 내가 잘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신과 적당히 흥정하고 거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인간과 합작하거나 의논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무슨 섬김이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4절과 25절의 말씀이 그런 내용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지금까지 자기들이 그렇게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신을 위한다고 엄청난 대리석으로 모양을 내고 거대한 신전을 지어 바쳤는데 그런 곳에, 그렇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신이 거하지 아니한다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덴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내용의 말씀은 너무나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 많이 바치면 복을 받는 줄 알았는데 정성도, 돈도 많이 바치면 많이 복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예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우리를 황당하게 하고 또 왠지 낯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동안 복음을 들었기 보다는 자기 철학이요 자기 종교 가운데서 성경의 믿음이라고 내 스스로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이었지 내가 사랑해서 복종하고 순종하여야 할 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9절부터 보면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17:29-30)라고 합니다. 참되신 신을 사람들이 고안해낸 형상물로 조각을 하거나 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상물을 만들어 섬기지는 아니한다고 해서 이 말씀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상물을 만들지 않아도 무언가 고안해 내는 것은 사고방식일 수도 있고, 가치관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도 다 우리가 고안해 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신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신에 대한 생각들을 고발하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고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배척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3. 나의 실상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배척하는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었던 철학,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능력을 배가 시키면서 영원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즉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것 때문에 참되신 주인인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치라 말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반성일기 쓰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와 방향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하여 살아온 것이 죄임을 알고 이제는 주님을 향하여 사는 것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31)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철학과 종교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능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 주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 주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오늘 말씀 앞에서 잘 점검하셔야만 합니다. 혹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죽으신 것입니까?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9:13)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머리한 하나님의 교회란 모두가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믿음의 실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실상이라면 우리는 과연 무슨 말만 하여야 마땅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할 말이 없어질 것입니다. 조용하여 질 것입니다. 겸손하여 질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돌아보니 부끄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용서를 알면 입을 가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로 인하여 그 용서의 힘으로 감사하며 용서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 안에서 이런 바른 분별을 가지고 주를 찾을 수 있는 예원 가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참 예수님을 만났다면 우리에게서 어떤 증상이 보이는가를 점검하시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존귀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문제와 또 성경을 읽는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오늘 말씀에 철학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며 또 아덴에 신전이 많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인간이 주체가 되어 알게 되는 진리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4. 인간의 철학과 하나님의 복음은 어떻게 다르다고 말씀 합니까?

5.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종교와 기독교의 복음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7. 음을 들으면 우리가 황당할 수밖에 없는 까닭과 또 우리에게 깨져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요구는 무엇이며 또 우리가 듣는 복음의 기능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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