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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본문 / 18:18-28

 

 

1. 형통

나이 많으신 분들을 보면 믿는 분이나 믿지 않는 분이나 빨리 죽어야 되는데 빨리 죽지 않아서 자식들에게 폐만 된다.”고 하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들이 진정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죽고 사는 문제는 우리가 원한다고해서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고 합니다. , 생사화복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며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는 살아있는 이유를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면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 가르치시던 어느 교수님이신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가 안 될 사람이 목사가 되면 사고를 친다.’는 것입니다. 그 사고라는 것이 무언가 하니 네 가지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 자신이 괴롭고, 가족이 괴롭고, 교인이 괴롭고, 하나님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를 더 살면 더 괴롭게 할 일뿐이니 빨리 죽는 것이 났다는 생각을 요즈음 더 실감나게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마음처럼 빨리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죽어 마땅한 자들인 우리를 지금도 살게 하시는 이유는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하시려고 이렇게 오래 살려 두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언제나 내 뜻과 내 마음대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과연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사느냐, 하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왜 구하는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로나 사업 혹은 결혼 등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으니 잘 풀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모든 일들이 우리 마음대로 술술 풀리고 만사형통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일이 꼬이고 고난과 어려움을 당한다고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성이 우리 안에 뿌리깊이 박혀 있기에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도 내 뜻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펼치고자 하는, 하나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있지 않는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에서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자신은 아시야 지역으로 가고 싶었지만 성령께서 막으셔서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왔는데도 일이 잘 풀리기는커녕 가는 곳마다 핍박과 대적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었다고 내어버린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빈틈없이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의 일과 나의 뜻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형통이라고 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내용만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증거 되는 방법도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고 꺼리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천국의 비밀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몰라야 할 사람에게는 모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데도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2. 핍박 그리고 주의 종

첫째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도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1:28)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아주 쉽고 확실하게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작정을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며 그렇게 순종하여 살려고 하면 당장 핍박이 오게 될 것입니다.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서 또는 교회 안에서까지도 올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가족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믿는다는 가족에게서나 믿는다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뭘 그리 별스럽게 믿느냐고 할 것입니다. 너 혼자 잘났느냐며 집단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외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로워질 때 어떤 분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주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고 합니다. 세상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시는 고난을 통하여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은 고생스럽습니다. 죄인이 고생스럽게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위하여 고생스럽게 사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당하는 고난은 다른 것임은 분명하게 아셔야 만합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9-10)라고 합니다. 사람의 일생이 주님의 분노 가운데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고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부터 이어진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8:9-11)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린도 지역에 많기에 두려워말고 잠잠하며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2절부터 보게 되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18:12-17)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하시고서는 또 대적이 일어나 재판정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갈리오 총독이 고소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록 고소를 대적들에게 고소를 당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인 총독 갈리오를 사용하셔서 바울이 해를 받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고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고생은 다 하는 것 같은데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는 방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싫은 자들로 말미암은 핍박을 통해 세상의 모습이 어떠함을 드러내시고 또 그 핍박으로 말미암아 복음 전하는 자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이것이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일 후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에서 여러 날 더 유하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로 떠나면서 브리스길라과 아굴라가 함께 동행을 합니다. 겐그리아를 지나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 앞에 무슨 서원하는 바가 있어서 머리를 깎고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에서도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러자 다른 곳보다 복음을 잘 받아 들일뿐 아니라 더 있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면서 그곳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두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핍박받는 곳에서는 더 있어야 하고, 더 있어 달라고 하는 곳에서는 오히려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주의 종으로서 이제 자기가 사는 것이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종일뿐임을 말씀해 주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만나게도 하시고, 헤어지게도 하시고, 교회를 정하게도 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뿐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고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뜻들은 결국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질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에베소 지역에 아볼로라는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왔습니다. 학문도 많고 구약성경에도 능통하고 언변에도 능하여 성경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었으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 부부가 이미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함께 지나고 에베소까지 온다고 하여도 약 2년 미만인데 아볼로 같은 학문이 많은 사람이요, 구약성경에 해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 가르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하면 우리는 벌써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젖을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게 되어 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고 아볼로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가르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볼로가 오늘 본문에 보면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18:27-28)고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십자가의 도를 가르침 받은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서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떠나도 하나님의 일은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드러나는 인물이라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또는 아볼로 같은 사람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보다 전혀 부족함이 없는 복음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글에는 그렇지 않지만 말에는 어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말에도 능통하여 성경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 하여 유대인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역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1-9)고 합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아볼로파가 다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을 뿐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결코 자기의 잘남이나 우월감을 가지고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사도의 책망을 받고서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고 열심히 주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뜻 성취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경은 이 말씀뿐만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보고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것임을 확인하시고 예수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6장을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6:38-40)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 하나님의 뜻이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 최대의 선물임을 기억하셔서 언제나 삶 가운데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까닭과 뜻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은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4.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고난을 당하는 이유와 뜻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오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은 어떠합니까?

6. 오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주의 종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7. 주 안에서의 동역자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8. 우리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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