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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본문 / 19: 1- 7

 

 

1. 요한의 세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을 때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받았다면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보면 바울사도가 에베소지역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빠진 듯한 모습이 보여서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9:2 )고 물으니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19:2 )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으니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란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치면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아볼로와 같은 입장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18:24-25)고 합니다. 아볼로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기는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자세히 하나님의 도를 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무엇을 증거 하였겠습니까? 아마도 바울사도가 에베소 사람들에게 증거 한 것처럼 세례요한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1-12)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란 자기 뒤에 오실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을 소개할 뿐입니다. 자신은 그 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과 성령이란 심판과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 즉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알곡처럼 곳간에 들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쭉정이로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의 세례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받고 알고 있는 요한의 세례가 무엇을 증거 한 것인지를 다시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의 보내심 등을 다 증거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안수를 하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까? 받았다면 우리가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고 단지 중생만하는 것은 저급한 신자이고, 예수 믿고서 성령 받아 방언 정도는 해야 좀 더 고급한 신자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방언과 예언이란 아직 계시의 기록이 완성되기 전의 상황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계시의 기록이 완성되고 난 지금은 예수 믿는 것과 성령의 세례가 동일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자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사단의 권세아래 붙들려 있는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다르게 기록된 곳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성령 세례

우리는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의 경계를 넘어선 것을 사도들에게 확인을 시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처럼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임한다는 것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임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확인을 통하여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도 얼마든지 주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의 선택과 긍휼로 불러내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내가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암송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믿으면 제일 먼저 암송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무슨 주문처럼 어려서부터 외우고 아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알기는 알지만 믿지는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도 압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건이 이미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 해서 아는 그 사람의 삶이 종말론 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되어야지만 그런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4:13-14)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부분의 삶이 이러한 신앙의 갈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갈등조차 없다면 성령이 임한 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라면 이러한 신앙의 갈등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보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갈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4-17)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아빠라는 표현은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있는 아이는 염려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자기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걱정과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나님 아버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라면 장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늘에 속한 기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 까지는 고난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사랑하겠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기에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성도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에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증거인 것입니다(8:18-25). 그런데 우리가 늘 이렇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 역시 강합니다. 그래서 땅에 것들이, 세상의 것들이 떨어져 나가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즐길 수가 있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계시기에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에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언약의 핵심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신에 노예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초적인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에 모든 인간은 모두가 다 자기가 최고인줄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나 말고 다른 한 사람을 그것도 십자가에 죽었다는 그 사람을 나의 왕이며,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나의 왕으로 또 주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되고 배워서 그냥 지식으로 주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기에 자기를 위해주는 예수를 부르며 말로는 주라고 하지만 내용으로는 종을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기가 주인 된 자리를 예수님께 양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도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6::7-14)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란 윤리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죄란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는 자기에게는 일체의 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는 이미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도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에 우리의 두려움과 심판의 주가 되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임하셔서 하시는 일이며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바르게 알고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 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령 받은 자의 소망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 즉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고향이라고 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소망을 소망이라고 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것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아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가 기록 되어 있는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고 합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믿을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성령이 임한 자만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는 자만이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자입니까? 예수님을 주라 부르면서 혹 땅에 구하며 사는 자는 아닙니까? 아니 구하지는 않더라도 나에게 그런 것이 없음으로 불안해하며 또 원망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잘 점검하시어서 우리가 말과 혀끝으로만 주를 부르는 자들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과 불의 세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우리가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이며, 초대 교회 당시와는 어떻게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까?

3.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이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어떻게 분별이 되며, 믿는다면 어떤 증상이 있다고 합니까?

5. 주를 믿는다 하면서도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취하신 조치는 무엇입니까?

6. 성령으로 말미암은 고백과 배워서 하는 고백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성령이 임하셔서 하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은 무엇입니까?

8. 성령이 임한 성도의 삶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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