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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복음으로 인해 따로 세워진 제자들

본문 / 19: 8-20

 

 

1. 우리의 자랑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모임들이 있습니다. 혈연으로 모인 가족과 친지들의 모임부터, 학교모임, 직장모임 등 여러 형태의 모임이 있지만 사람들이 그런 모임에서 주로 대부분 하는 이야기들이 무엇입니까? 물론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일들에 대해 말하기도 하겠지만 가만히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자기 자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것들은 감추고 자랑거리들은 더 과장하여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랑들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세상에서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나는 비록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없어도 예수 믿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요 자랑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믿는다고 하는 우리를 돌아봐도 그러한 분위기가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고 부러워하는 것들이 대화의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늬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 속은 여전히 세상 자랑으로 가득한 게 우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세례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모습이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아래, 즉 아담의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죄란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사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담의 죄악을 끊어버리시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아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 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됨으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믿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구하는 것임을 로마서 8장에서 보았으며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11장에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가 사람들과의 모임을 통해 무엇을 느끼며 또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빛과 어두움으로 분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어지고 분리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결국 그것은 빛 되신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타나는 증상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무엇이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이고 또 무엇이 하늘 아래 땅에 속한 것임을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예수를 믿고 또 함께 교회에 다닌다고 하지만 정말 내가 복으로 여기고 또 나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과연 주님의 은혜와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들이 자랑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에 속한 것들로 우리의 자랑 삼고 싶은 것입니까? 우리는 하늘의 것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꺼내 놓아도 듣는 이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으니 그들이 인정할 만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랑거리로 내어 놓고 싶은 것은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 사는 존재라면 우리에게서 아직도 수많은 분리와 따로 세워짐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런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2. 분리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이 됩니다. 첫째는 따로 세우는 것입니다. 8절부터 보면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 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9:8-10)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합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율법에 대하여 충성스러웠으면 이방인의 땅에서도 회당을 지어놓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회당에서 바울사도가 석 달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사도가 증거한 복음을 듣고도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복음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그들을 떠나서 복음을 받는 자들인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하는 것입니다. 두 해동안 날마다 두란노서원에서 강론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분리 즉, 따로 세우는 것이 어떤 뜻입니까?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1:44)고 하셨습니다. 거룩이라고 하면 바리새인을 따라갈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분리를 잘 하였으면 바리새인이라는 말자체가 구별된 자’‘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나온 말로 그들을 지칭하겠습니까? 그들은 모세의 율법만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까지 정확하게 생활에 적용하면서 메시아의 약속에 대하여 인간 편에서의 성취를 확보하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종교적인 율례(행위)로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애씀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거룩하게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도하에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님 안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종교에서 복음으로, 주인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낡은 옷에서 새 옷으로, 자기 의에서 주님의 의로 분리가 일어나고 따로 세워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리와 따로 세워짐이란 예수님의 사역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6:5-9)고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도 가만히 보면 한절 한절마다 구별이 있는데 바로 너희그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지듯이 바울사도의 복음을 듣고서도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서 모두 믿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는 자들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빛이 비춰지면 빛과 어두움이 자연스럽게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28:23-27)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증거 하여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사도행전의 끝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끝 날까지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내 안에서 과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안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여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을 잘 하든지 못하든지, 빠르든지 느리든지 간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겠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추구하고 자랑하고 이야기하는 쪽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것과는 너무나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가 너무나 적고 또 본인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를 못한다고 하여도 마음속에서는 분명한 반응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데하는 이러한 마음들이 예수를 믿는 다른 사람들이 모인 가족이나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께서 만나게 하시고 또 그렇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인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리되어지는 소외감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에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3. 에베소 사람들

그리고 둘째로는 희한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19:11-16)고 합니다. 바울사도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니 병이 났고 악귀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유대인들도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며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를 명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 중에 유대인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악귀들이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며 달려드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희한한 능력을 행한 것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종으로서 시킨 것을 한 것뿐입니다. 이 일 후에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다니면서 병자들 위에 계속하여 놓지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바울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아들들은 이러한 바울의 기적과 능력을 이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바울이 행하는 그러한 일들이 바울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재능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일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주의 은혜와 또 하나님의 주인 되심은 망각한 채 뭔가 기술적인 부분을 배워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미 죽은 자요 또한 날마다 죽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희한한 능력이 나오더라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부족과 연약을 자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리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러한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질병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육체의 가시를 인하여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를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간질로 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 보면 자신의 육체에 사람들이 보면 시험이 들 만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대접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의 육체를 보면 시험에 들 만한 질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간질이라면 자기의 손수건만 가져놓아도 병이 나아버리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설교하다가 입에 거품 물고 벌벌 떨며 쓰러진다면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바울사도의 능력이나 유명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스게와의 아들들은 이용하기 위하여 불렀던 것입니다. 믿지도 아니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잘 알아보겠습니까? 거라사의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려 사람들이 제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안에 들어있던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우리를 벌써 멸하려고 오셨나이까?” 하면서 귀신들이 먼저 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나서 믿는 자들이 나와서 마술 책들을 불에 태워버립니다. 당시에 에베소에 이 마술 행위가 심해서 마술 서적을 에베소 문서라고 까지 말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책들은 아주 비싸서 은돈 하나가 노동자 하루 품삯이 되는데 은 오만이라면 엄청난 양의 책들을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마술을 하면서 주술적으로 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행하던 일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흥왕하여 세력을 얻어 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에게서 분리되기 위하여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가지기 원하여 부른다면 아직도 분리가 되기는커녕 마귀아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자 그 군대 귀신들이 돼지 떼 2천 마리에게로 들어가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그러자 그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떠나가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에베소 사람들은 은 오만이나 나가는 마술 책을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이 그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지키기 위해 주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주의 능력을 맛보았기에 마술 책을 불살라 버리는 자입니까? 분명한 것은 오늘도 우리 안에도 이러한 분리와 따로 세움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범사가 주로 말미암아 다스림 받아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하늘의 것으로만 무장하고 갈망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령이 임하기 전의 모습과 성령이 임한 후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진다고 합니?

2.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3.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4. 복음으로 말미암은 분리가 넓은 의미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떻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5. 스게와의 아들들이 악귀에게 당하듯이 오늘날도 그들과 같은 모습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6. 울이 큰 능력을 행함에도 그것이 바울의 실력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7. 바울과 스게와의 아들들이 똑같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결과가 다른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성령이 임한 자와 마귀 아래 있는 자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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