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4,879
오늘 : 282
어제 : 373

페이지뷰

전체 : 78,758,407
오늘 : 927
어제 : 1,144

제목 /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나타난 하늘의 위로

본문 / 20: 1-12

 

 

1. 시각차

에베소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전도의 내용으로 인하여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소요가 그치자 마게도냐를 거쳐 가면서 여러 말로 제자들을 권면하고 헬라에서 3개월을 있다가 여기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배를 타지 않고 다시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를 작정하고 돌아가는 중에 드로아에 이르러 일주일간 머물게 됩니다. 이제 내일이면 바울사도가 떠나게 되는데 떠나기 전날 저녁식사를 위하여 함께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사도가 강론을 시작하여 밤중까지 계속되니 유두고라는 청년이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보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그 사람을 안고서 떠들지 말라고 하며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말을 합니다.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겪은 수많은 사건과 사고 중에는 정말 기억하기도 싫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월호 사건입니다. 그런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또 어떤 말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직 다 피어나지도 않은 어린 학생들이기에 그들의 계획하고 꿈꾸어 오던 것들이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을 잃어버린 유족들에게 과연 얼마의 보상금을 주어야 위로가 되겠습니까? 얼마를 준다고 하여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런 가족들에게 가장 큰 위로란 죽었는지 알았는데 다시 살아났다면 그것이 최고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위로란 단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어있는 것으로 봅니다. 숨 쉬고 밥 먹고 일하면서 사회구성원으로 성실하고 바르게 산다고 하여서 성경의 시각은 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기에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상태 그대로 있다면 이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진노와 저주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의 관점에서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성경전체를 통하여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창세기 5장에 보면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5:28-29)고 합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안위하리라는 뜻입니다. 안식과 위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과 위로가 왜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7-19)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수고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창조의 영광을 위하여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창세기 315절에 등장하는 여인의 후손에 대한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안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을 기다리는 최초의 계시가 바로 노아인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가 받은 은혜입니다. 인간에게 안식과 위로가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세상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상태이기에 참으로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세상은 끊임없이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 인간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좋은 인간관계,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거짓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발 딛고 살고 있으니 그러한 약속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2. 참된 약속과 위로

그러나 참된 약속이란 성경만이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12)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저주아래 있음을 시편 90편에서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이 주님의 분노 중에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며 사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세상과 인생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분노와 진노 중에 있는 세상과 인간이기에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무엇이 안식과 위로이겠습니까? 다시 노아시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905절에서도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무엇이 위로였겠습니까? 부자 되는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결혼하는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사업의 성공이 위로였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존경받는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교회 부흥과 성장이 위로였겠습니까? 자녀가 좋은 대학 진학한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모두가 홍수로 다 죽어 가는 현장에서 참된 위로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방주에 탄 것이 위로였습니다. 그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위로였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에도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노아 때와 같은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세상사는 재미가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노아가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성의 롯의 사위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슨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사야 40장에 보면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40:1-11)라고 합니다. 죄 사함이 위로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모든 육체가 보게 될 것이 위로입니다. 목자가 양 무리를 먹이고 안으시고 인도하심이 위로입니다. 이 모든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 구약의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이러한 위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속되는 반역과 징계 속에서도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그 위로를 기다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그런 위로를 기다렸지만 참된 위로를 기다린 사람들은 땅에 속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인생이 풀과 같고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음을 알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위로가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2::25-35)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로서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합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위로인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니 마치 아기 예수를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오는 것을 보고서 그 아기를 안고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그리스도를 봄으로 이제 죽는데 죽은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위로를 우리가 좋아하고 기다리고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위로

그러므로 이러한 위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소식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34절에서 많은 사람의 패함과 흥함의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패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흥하게 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위로로 오신 분의 역할이며 또한 오늘날 복음의 역할, 말씀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리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고통이기도 하거니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에서 여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주님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연 저주 받은 이 세상에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부자가 되고, 여유롭게 웃고, 모든 사람의 칭찬을 듣는 것이 위로이겠습니까? 아니면 가난하고, 울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욕을 얻어먹고 악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위로입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6:19-31)고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는 히브리어로는 엘레아자르인데 하나님이 도우신다 또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을 그리스어화한 형태입니다. 이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대표하는데 그 가난한 사람이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체적으로 가난하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가난이란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기에게는 어떠한 의도 없기에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주님의 위로만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 성도들이고 성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저주 받은 이 땅위에서 오늘 우리는 어떤 위로를 원하며 또 과연 무엇이 진정한 위로가 되겠습니까? 과연 우리에게 쏟아질 저주를 대신 지신 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참된 위로를 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성령이 임함으로 자신의 죄와 악함을 알기에 심령이 곤고한 사람, 자기의 자랑이 없고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 그래서 주님의 위로만 기다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더 이상 외모로 사람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기에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위로나 세상의 자랑이나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니 오늘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가 그런 자들이기를 바랍니다. 오직 장차 나타날 영원한 위로와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자로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의 때가 남아 있기에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4:11)라고 합니다. 이러한 안식과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에서 모든 위로의 주님께서 그 눈의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치지 말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주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주님의 위로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적 시각의 죽음이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2. 세상을 바라보는 성경적 시각과 그런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마귀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3.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습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이사야 시대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5. 이스라엘이 기다린 위로가 어떻게 나타났고 또 그 위로는 무엇입니까?

6. 이스라엘의 위로의 역할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7. 성경에서 말씀하는 가난한 자란 어떤 자를 말한다고 합니까?

8.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57 9월 13일 / 로마서 4. (롬 1 : 14 - 17)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관리자 2015.09.12 516
256 9월 6일 / 로마서 3. (롬1:8-13) 같은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들의 삶 관리자 2015.09.05 437
255 8월 30일 / 로마서 2. (롬1:1-7)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 관리자 2015.08.29 456
254 8월 23일 / 로마서 1. (롬1:1-4) 복음으로 살아나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 관리자 2015.08.22 549
253 8월 16일 / 사도행전81. (행28:23-31) 오직 주의 말씀대로, 오직 은혜로 관리자 2015.08.15 539
252 8월 9일 / 사도행전80. (행28:1-15) 바울을 통하여 보게 되는 성도의 삶 관리자 2015.08.08 456
251 8월 2일 / 사도행전79. (행27:20-26) 내게 말씀하신 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관리자 2015.08.01 439
250 7월 26일 / 사도행전78. (행26:24-29) 바울이 이르되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관리자 2015.07.25 610
249 7월 19일 / 사도행전77. (행26:1-8) 소망을 말하지만 다른 소망을 꿈꾸는 자들 관리자 2015.07.18 443
248 7월 12일 / 사도행전76. (행25:13-22) 성도들의 삶의 우선순위 관리자 2015.07.11 488
247 7월 5일 / 사도행전75. (행24:21-27) 부활과 심판을 믿는 자의 삶 관리자 2015.07.04 584
246 6월 28일 / 사도행전74. (행24:1-9) 전염병에 전염된 자들의 삶 관리자 2015.06.27 626
245 6월 21일 / 사도행전73. (행23:1-11) 주께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관리자 2015.06.20 520
244 6월 14일 / 사도행전72. (행22:24-29) 로마 시민권을 내 보이는 바울의 신앙 관리자 2015.06.13 666
243 6월 7일 / 사도행전71. (행22:2-21)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의 체험 관리자 2015.06.06 578
242 5월 31일 / 사도행전70. (행21:37-22:1) 부형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 관리자 2015.05.30 513
241 5월 24일 / 사도행전69. (행21:15-36)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이 하신 일 관리자 2015.05.23 591
240 5월 17일 / 사도행전 68. (행21:1-14) 주를 사랑함으로 주의 뜻대로 관리자 2015.05.16 595
239 5월 10일 / 사도행전67. (행20:28-38)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살피는 감독자 관리자 2015.05.09 739
238 5월 3일 / 사도행전66. (행20:17-27) 사명자 바울과 그 사명의 내용 관리자 2015.05.02 600
Board Pagination Prev 1 ...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