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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를 사랑함으로 주의 뜻대로

본문 / 21: 1-14

 

 

1. 인생의 어리석음

성령께서 교회에 감독자를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돌보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감독자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 제대로 증거 되고 있는지를 감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피가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능력인지를 사람들이 모르기에 자꾸만 자기들의 피와 땀을 섞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은 사나운 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자기를 따르게 하는 자들이 나오기에 하나님의 교회에 감독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또 어떻게 부탁하는가 하면 사도행전 2032절에 보면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감독자에게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들은 은혜의 말씀에 붙들려 있는가 아니면 특정한 어떤 사람에게 붙들려 있는가를 점검하며 항상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탁하고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지 전에 먼저 정리를 하나 하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에 모인 사람이라면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주님의 뜻을 알고자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알고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기에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 한다지 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남들이 자유를 사랑하지만 자신은 복종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 복종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복종하고 싶어서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하기에 그것이 나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복종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사랑하는 조국이든, 부처이든 간에 그 대상을 사랑하기에 복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님의 뜻을 알아서 그것을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행복이기에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사랑하기에 스스로 복종하기 위하여 알기 원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왜 우리는 이런 복잡한 질문을 처음부터 하는 것입니까? 그저 쉽게 주님의 뜻을 순종하면 만사형통하고, 주님의 뜻을 어기면 만사불통 하니 알아서들 하시오, 하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 무엇이니 이렇게 저렇게 순종하라고 하면 알아듣기가 쉽고, 적용도 쉽고, 열심을 낼 텐데 왜 그렇게 어렵게 시작을 하느냐는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지는 것으로 들어왔습니다. 또 그런 것이 우리의 상식에도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풀리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이 겹치게 되면 무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여서 저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무슨 실패를 하면 교회 안에서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라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그런 고생을 하는 것이라고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이 헛된 것임을 알도록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이 실패가 아니고 오히려 성공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관심이 있어 참견하시고 간섭하고 계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버려두신 경우는 그러한 어려움이 닥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가 흥하든 망하든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악인이 평생 형통하고 죽을 때도 고통도 없고 그의 후손들도 잘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소의 기준대로 삶을 해석하지 말고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보고 듣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심사는 주님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잘되는가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 묻고 기도한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잘되는가에만 초점을 맞추어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로문제, 결혼문제, 무슨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손해보고 고생하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고생하고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기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일을 할 때 고생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므로 고난이 닥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 마음 안에도 이런 생각이 또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고난당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하여주고, 순교자라고 기념하여 주고, 박수치는 그런 고난이라면 감당을 하겠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오해와 핍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이라면 과연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따라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 삶이라면 우리는 주저주저하게 되지 쉽게 그 길을 따라 나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2. 같은 사건 다른 시각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가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어떤 핍박과 조롱과 멸시가 오더라도, 오직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알아주시지 아니하신다고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다면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상주시고 현세에서는 몰라도 내세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대우를 해 주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따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반발이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가지고 그것을 주인이 사례하겠는가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서도 저는 단지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종으로서 할 것을 한 것뿐이라고 답하는 것의 종의 바른 자세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는 요구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이라면 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말이 되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성경을 보는데도 사장이 보는 성경과 사원이 보는 성경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장이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6:5)는 말씀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직원들은 사장의 말을 잘 듣고 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원들은 같은 성경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마도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6:9)라는 말씀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사이도 마찬가지이고 부모와 자식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와 교인도 똑 같이 그렇게 적용을 합니다. 목사들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6)거나 또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는 말씀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하면 반대로 성도들은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3:7-9)고 말하며 그래서 바울은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18:3)고 주장하며 이것이 주의 뜻이라고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먹을 권리가 있어도 그것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폐가 되지 않게 하고,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럼 도대체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중간 중간 들리는 곳에서 다른 제자들이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잡혀서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에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극구 만류합니다. 성령께서 미리 알게 하신 것은 그러한 고난을 피하라는 사인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오히려 그러한 길로 들어가라는 사인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느 것이 주님의 뜻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21:4)고 합니다. 더 나아가 10절부터 보면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21:10-11)고 합니다. 두로에서도 바울사도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돌레마이에 이르러 하루를 지내고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잡아매고서는 이 띠 임자가 이렇게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제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친히 알려주신 것은 그것을 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죽으려고 그러느냐며 말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당신은 할일이 많은데 왜 그러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의 죽이려는 음모를 알고는 일부러 다른 길로 피하여 오기도 하였는데 왜 이제는 그렇게 죽는다는 곳으로 가는 것인가, 하고서 말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사랑하여서 말리는 것입니다.

 

 

3. 왜 주를 따릅니까?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닥쳤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뜻이라면 바울 같은 전도자를 더 살리시고 능력도 더 베풀어서 더 많이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사도는 무어라고 보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것은 자신도 알았지만 그러나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 것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체포를 당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그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고 합니다. 왜 울면서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서 더 이상 만류하지 아니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잘하면 어려움이 없어지고, 안 되는 일들이 잘 풀리고, 만사형통하다는 식의 생각들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대로 가는 길인데 어렵고 고난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조차도 장엄하게 모든 사람들이 추앙하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죽음이아니라 멸시와 천대 속에서 비참하게 힘없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영화 같은 곳에서나 순교자가 장엄하게 그려지지만 제자들이 순교하는 데는 그런 장엄한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뜻은 전혀 위축되거나 포기되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십자가의 방법인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들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면 주님도 우리의 일을 멋지게 성공시켜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합니다. 누가 말리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길이며 또 그 길 끝에서 우리의 소망의 성취를 보게 되는 길도 아닙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문이며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문을 들어가 그 길을 걷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 같은 자들이며 또 오늘도 주 앞에 나와 주의 음성을 들으며 내 생각과 내 원함과는 다르지만 그것이 주의 뜻임을 알아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원가족들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가치가 인정받는 그 나라만을 소망합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사모합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혹 모르니 오늘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태도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내가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사랑해서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뜻을 따라야만 세상에서 성공하고, 성공은 아니더라도 평안하고 형통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주님을 뜻을 묻고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제부터 우리의 생각을 주 앞에 바르게 고쳐먹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 하여서 욕을 얻어먹는 것을 핑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편하고자, 어려움을 피하여 가고자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들이 만류하니 그것이 주의 뜻이라고 하며 주저앉았다면 편한 길과 편한 사역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그 길이 어렵고, 고난이 있고 또 죽음이 기다린다 하여도 주의 뜻이라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것이 아닌 주를 사랑하여 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내 편리함을 따라 말씀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정말 주를 사랑하여 주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지 물어보고 남은 삶이 주 안에서 바르게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에 대해 모를 때 나타나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2. 성경과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 실패는 어떻게 다르며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내 삶에 대한 주님의 뜻을 묻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4.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보는 사람마다 주님의 뜻이 다르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보이신 일에 대한 사람들의 뜻과 사도 바울의 뜻은 어떻게 다릅니까?

6.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보이시는 십자가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7.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우리가 마지막까지도 주안에서 점검해야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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