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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형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

본문 / 21:37-22: 1

 

 

1. 거룩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주어져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속에 간직한 자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속에 있는 믿음으로 인해 나에게서 무엇이 보여 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믿음이 있는 나에게는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고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우리들도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증거 되게 하며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설사 언약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이루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은 언약 안에서 영원할 것임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이 바라볼 때는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정신 나간 사람들의 모습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 선 우리, 믿음이 있노라 하는 우리가 과연 우리의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분명 천국과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사는 믿지 않는 사람과는 차별된 모습이 있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과연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 그런 차별화 된 모습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보면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8:37)고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0장에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10:25-26)고 하십니다. 두 말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그래서 믿지도 않는 유대인들임에도 그들은 모든 종교적인 활동은 다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에 못지않게 열심히 한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처럼 하면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3:4)라고 하며 또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6)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의 차별의 표징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러한 종교적인 열심으로 말미암은 종교적인 행위를 우리의 신앙에서 배제했을 경우 세상 사람과의 차별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 신앙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종교적인 행위를 신앙에서 배제한다면 과연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우리와 세상의 차이는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은 바로 이점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신앙

지난 시간에는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에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건짐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로마군대에 의하여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천부장은 바울을 구하려는 의도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무슨 소요가 일어난 줄 알고 바울을 체포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셔서 바울을 건지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23:11)고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사 바울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담대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의 뜻대로 돌아가고,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이 통일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일어나고 벌어지는 모든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음을 바라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바울이 로마군대에 체포되어 그들의 수비대 안으로 데려가는 중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하자 허락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비대로 가는 계단위에 서서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22:1)고 하여 히브리말로 자기의 변명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단순히 바울이 자기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을 기준으로 해서 바울을 생각하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를 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보통인데 바울에게서는 그러한 반응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형들이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반말로 들려질 수 있지만 사실은 부모 형제 여러분이라는 아주 정중한 표현의 호칭입니다. 이 호칭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만약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자신을 반대하고 죽이기 위해 쳤던 자들을 향해 부모 형제 여러분이라는 정중한 표현의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개인적으로 친한 자와 친하지 않은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친분도의 여부는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나 말에서 당장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자신을 반대하고 공격하며,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기 까지 하는 대적 자들을 향해 공경어린 호칭을 사용하며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자신을 반대했던 것에 대해 잊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정중하고 친밀한 호칭을 사용하며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미움을 속에 감추고 이러한 호칭을 사용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움직였던 바울이 속에 미움을 감춰두고 정중한 호칭을 사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그렇게 볼 때 자신을 공격하고 해치려는 사람에 대해 반감이나 미움을 갖지 않고 정중한 말을 하는 바울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런 마음이 무엇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모습은 스스로의 인격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는 이러한 모습을 추구하며 이러한 모습을 스스로 갖추기 위해 인격을 수양하고 도를 닦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나 그를 미움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높은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을 강조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바울과 같은 모습은 우리가 인격을 수양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을 수양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감추고 억누르는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해치려는 자에 대한 미움과 반감이 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면서 얼굴이 인자함과 미소를 띠울 수 있는 것을 고매한 인격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내라는 것으로 이뤄내려고 하는 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과연 바울이 이런 수준일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다른 점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가르침에 있어서 무척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를 세상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종교가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씨가 우리 속에 있음으로서 자연히 맺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스스로 열매를 맺기를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를 닦으면서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 가는 일방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기독교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바울뿐만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었던 스데반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59-60)고 합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을 들고 치려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 하는 기도입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고, 미워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본래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 복수와 심판을 요구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는 스데반의 마음이 과연 인격수양으로 맺어진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스데반 집사가 하나님께 하는 간절한 기도가 미움을 억누르고 자비를 보이는 가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개인의 노력과 열심히 만들어 낸 열매가 아닙니다. 인간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모습은 다만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 주께서 죽어 가는 스데반을 다스리고 계시고 또 스데반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증거가 용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흔히 말하는 선행을 하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자신의 덕을 쌓는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말하며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냥 믿고 섬기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기에 그 다스림과 통치를 받아 순종하자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욕심 그리고 우리의 목표까지도 몽땅 하나님께 복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에게 있는 것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쓸모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라고 생각했던 것도 모두가 악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선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바울을 돌로 치는 유대인들도 그리고 그 돌에 맞는 바울 사도도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분명 유대인은 나쁜 사람이고, 바울은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을 욕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그것을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는 바울을 치는 유대인도 또 그 던지는 돌에 애매하게 맞는 바울도 같은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돌에 맞는 바울도 또 돌을 들어 치는 유대인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살아남을 사람인 것입니다. 저 사람이 악하면 너도 악하고 저 사람이 못났으면 너도 못났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바울의 신앙인 것입니다.

 

 

3. 우리의 신앙

이러한 신앙에서는 비록 자신을 해치는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것이 보일 뿐입니다. 악한 나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듯 악한 너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달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이어야 하며 또한 그런 그에게 내 삶의 모습이 주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알기에 그에게도 동일한 주의 은혜와 사랑의 통치와 다스림이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우리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인격 수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바울을 다스리는 신앙으로 인해 나타나는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서 바울과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말씀을 읽되 말씀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되 순종할 분으로 믿지를 않습니다. 삶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기 보다는 본래의 내 성품과 욕망을 따라 움직이기에 바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를 신자라 이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인 것입니다. 내가 못난 자이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필요함을 믿는다면, 신자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만 합니다. 상대방의 행동과 성품을 기준으로 해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제 아무리 선하고 양심 바르게 산다고 해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자는 어디에서든 이러한 시각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 살아가면서 너는 어차피 지옥 갈 사람이니까 상대안하겠다는 시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옥 갈 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있어야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어쩌면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 수가 있음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해치는 유대인을 향해 부형들아라는 정중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이 가지지 못한 뭔가 큰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보이는 것으로서는 바울은 붙잡혀 있고, 당하는 입장에 있지만 주를 바라보며 사는 신앙의 시각으로는 바울 자신은 붙잡힌 것도 당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붙잡힘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을 부형들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는 자유 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7-12)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오늘 본문은 성취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부요함과 자유 함이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십자가의 신앙이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증거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믿음이 되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좁은 길을 걸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을 가진 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합니까?

2.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있음으로 세상과 구별된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3. 바울을 건진 천부장의 의도와 그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엇입니까?

4. 오늘 본문에 바울에게서 나타난 놀라운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오늘 본문의 바울의 모습이나 스데반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6.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과 기독교 신앙이 말씀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7. 우리가 주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자라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이웃을 향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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