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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의 체험

본문 / 22: 2-21

 

 

1. 거룩

종교에 있어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누구든 종교를 말할 때는 체험을 함께 말하며 그리고 그런 체험이 있을수록 그의 신앙은 더욱 높은 수준으로 여겨지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타종교에서 이런저런 신비한 체험들을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에도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체험을 이야기 하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신비한 체험이야 참된 하나님이 일으키신 역사로 얼마든지 인정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방 종교의 신은 우상이요, 참된 신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이방 종교 안에서 벌어지고 나타나고 있는 신비한 체험들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당이 병을 낫게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들을 무조건 엉터리요 사기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불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 신비한 체험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모두다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의 신은 신이 아니라고 여기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신비한 체험은 과연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분명히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애굽의 요술사들도 모세가 바로 앞에서 행하였던 것과 똑같은 이적을 보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일으킬 때 하수가 피가 되게 하였는데, 애굽의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같은 이적을 행하여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지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물에서 개구리를 올라오게 했을 때도 애굽의 요술사들 역시 같은 이적을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요술사들이 그런 이적을 행한 것은 과연 누구의 능력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단도 얼마든지 이적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보면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살후2:9-10)라고 합니다. 때문에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이적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비한 이적을 내세워서 기독교를 차별화하려고 하고, 신앙을 차별화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신기한 이적을 체험한 것으로 신앙을 구분하려고 하거나 남들처럼 나 역시 신비한 이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진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적 자체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친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이적과 권능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증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이란 결코 신앙의 증표가 아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간증과 인간의 생각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도 자신의 체험을 얘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된 까닭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변호이기도 하고, 자기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그의 동족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러한 내용은 사도행전 9장에서 일어난 내용들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하늘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분명 신비한 이적입니다. 아마 우리들도 나도 그러한 체험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을 하면 신앙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과연 무슨 이유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의 뜻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본다면 체험에 매달리고 체험을 원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명한다고 하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바울의 자신의 간증이기도 한 회심의 이야기를 보면 자기를 자랑하거나 우월하다는 것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이나, 자신을 잡아 가는 자들을 향하여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음을 변호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의 변명도 아닙니다. 바울은 단지 자기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수많은 간증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증을 듣고 나면 대부분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다르게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하여도 결국 자기 자신이 드러나고 결국은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받았다고 하는 은혜란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난에서 부자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무언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간증에 귀를 기울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까? 하면서 그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였다고 하면 금식을 하고, 헌금을 하였다고 하면 헌금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도 그러한 간증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도 많은 간증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내가 저 간증을 듣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는 내가 저런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많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변명, 바울의 회심체험기, 바울의 간증을 다 듣지도 아니하고서 듣다가 중간에 나오는 반응이 어떻습니까? 22절부터 보면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22:22-23)라고 합니다. 다 듣지도 아니하고 이런 자는 살려두면 안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의 이야기가 무슨 간증이 길래 이런 반응까지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바울은 듣는 무리들에게 부형들이라고 하는, 즉 자신의 아버지요 형제들이라고 호칭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율법에 열심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지금 자신이 전하는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까지 죽이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자기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 열심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노상에서 대낮에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멀게 되고, 다른 사람에 손에 끌려가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안수하여 눈을 뜨면서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이 말을 증거 하면서 어떤 자세로 하겠습니까? 그때에는 자기가 행하던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유대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전에는 그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처럼 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가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바울을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바울의 이 말이 지금 유대인들이 이 도를 전하는 것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나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10장에도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3)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바울의 이야기에는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이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드디어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 놈이라고 하면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기득권으로 여긴 것이 다 사라지고 서열이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다 가지고 태어납니다. 범죄 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다 동일하게 이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태어난 인간은 자기의 문화와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웁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형성되며 그리고 그때부터 자기들이 옳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이 옳다는 생각 속에 가장 큰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사람이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무엇이나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하였더니 놀랄만한 업적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과학도 발달하고, 우주도 개척을 하고,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천국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선을 행하기란 전혀 가능성이 없고, 그저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악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신을 위한다고, 선한 일이라고, 착한 일이라고, 옳은 일이라고 열심과 충성을 다하였는데 그것이 죄라고 말씀하신다면 이 성경의 평가를 우리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끔씩 악한 생각도 하고 나쁜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이 많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있으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이미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믿든지 무슨 종교를 가지더라도 내가 어느 정도는 해야지 신도 반응을 보여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속담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열심히 고기잡이를 하고 있을 때 불렀고, 세리도 세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불렀고, 삭개오도 뽕나무에 올라갔을 때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평소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였기에 그 열심을 보시고 부르셨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가던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마음속이라도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니던 사람이 오히려 그 예수님께 붙잡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선행도 예수 믿고 구원 얻는 일에 보탬이 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포로로 잡힌 것입니다.

 

 

3. 인간의 어리석음

이것이 유대인들은 듣기 싫은 이야기이며, 모든 인간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이런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자존심 싸움입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서로의 자존심 싸움입니다. 그 안에는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들을 챙기지만 끝까지 전쟁해보자는 것은 자기의 자존심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다 구겨지는 일입니다. 얼마나 못난 인간이면 다른 분을 믿어야 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못난 사람이어야 예수를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이 성경공부하고 나와서도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서로 자기가 말씀을 잘 깨달았다는 것으로 또 싸우는 것입니다. 서로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으로 자기변호를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자기변명과 자기변호에 열심인 자들인 것입니다. 때로는 얼마나 자기가 엉망으로 살았는가를 경쟁하기도 합니다. 전과 3범이었는데 극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면, 나는 전과 5범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한 일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도 가지고도 나는 이만큼이나 잘못하였다는 것으로 또 자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변명하지 아니합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만 증거 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6-7)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까? 날 때부터 가지고 나왔습니까? 아니면 다른 교회 교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 똑똑하여서 잘 알아들었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 중에 주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땅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들 마음대로 사고파는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보고 주인의 은혜를 몰라보니 우리는 자기변명에만 빠릅니다. 바울에게서 배운 자들이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는 일들이 일어나는 고린도 교회가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제대로 아신다면 그 은혜를 주신 주님만 자랑하고 증거 할 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바울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배후에는 살아계셔서 역사하신 예수님이 계셨음을 증거 합니다. 우리가 증거 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죽은 예수가 아닙니까? 그래서 조그만 일에도 낙심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배후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날마다 담대함과 평안 속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 뜻과 욕심이 아닌 말씀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체험 말입니다. 바울을 부르시고 붙드신 그분이 오늘 우리 모두를 부르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바울이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였다면 우리 역시 그러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에 복종하는 삶, 이 삶을 통해서 예수는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간증하는 아름다운 주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는 신비한 체험을 가진 것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까?

2. 우리가 신비한 체험과 같은 것으로 신앙을 차별화 하면 안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바울이 자기 신앙의 체험을 말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4. 리가 간증을 들으며 갖게 되는 마음과 우리가 간증을 좋아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유대인들이 바울의 신앙 간증을 듣고 죽이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유대인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인간의 그 모든 열심히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아닌 방해가 되게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진정한 믿음의 체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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