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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활과 심판을 믿는 자의 삶

본문 / 24:21-27

 

 

1. 부활

지난주에 바울사도가 고소를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고소의 내용은 전염병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죄목은 세 가지로서 천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고,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인 예수를 전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고발을 합니다. 이러한 고발에 대하여 바울은 전부 부인합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 간지 12일밖에 되지 않았고 성전이나 회당이나 성읍에서 아무른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증거가 있다면 증인을 세워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정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14절부터 보면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24:14-15)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의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자신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24:21)라고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 하였기에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변명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유대인의 방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 즉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분명히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물론 사두개파는 믿지 아니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성경대로 믿고 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다 믿었는데 왜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이야기를 인하여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이야기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신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자기처럼 예수를 핍박하는 자를 회개시켜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한다고 핍박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단지 한때 잠시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시킨 이단으로서 무덤 속에 꽁꽁 묻어두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사망이 잡아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증거한 것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증거 한 것은 지금도 살아서 일하시고 계시는 주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봄이 되면 부활절을 지킵니다. 춘분이 지나고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자는 것은 성경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4세기경에 교회에서 정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 부활의 절기를 지켰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에 없습니다. 그런데 4세기 이후로 교회 안에 정착이 되기 시작한 부활절이 부활의 주님이 증거 되기보다는 도리어 이방인들이 즐겼던 축제의 내용과 모습들이 더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일찍 들어간 나라들은 부활절 축제가 요란합니다. 부활절을 의미하는 영어 이스터’(Easter)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인 에아스트레’(Eastre)오스타라’(Ostara)가 합성된 말로, 유럽의 튜튼족이 숭배한 새벽과 봄의 여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즉 새벽은 어둠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봄은 새 생명이 겨울을 이기고 나온다는 의미에서 두 단어를 합성하여 부활절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부활절 계란이 나오고 또 부활절을 계산하는 방법이 나온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라지고 이상한 축제들만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성탄절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은 사라지고 온갖 이방 축제로 변하여 버린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부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으며 그리고 그 부활에는 두 종류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성만찬

오늘 본문 앞에 14절에도 보면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24:15)고 하여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에도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1-29)고 합니다. 여기 29절에도 보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말씀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이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이며, 그에게 모든 권세가 주어졌음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원하는 자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왜 사람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닌 것으로 결정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리 움직여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죽은 자가 뒤척거릴수록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고서 행하는 사람들 보기에 아무리 선한고 아름다운 일이라도 주님께는 악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이기에 아무리 내 스스로 선하고 옳은 일을 많이 하여도 죽어서 지옥가야 마땅한 죄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옳다고 고집하며 행한 그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결과가 나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가 스스로 의롭게 살고자 한 최종적인 모습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인정하며 예수를 믿는 것이란 사람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그 죽으심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고서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그 죽으심의 참여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우리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살과 나의 피, 나의 혈육의 노력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2-58)고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시면서 그들이 따라 온 것은 먹고 배불러서 따라 온 것이지 표적을 보고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하려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6:28)하고 묻습니다. 이에 에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고 하십니다. 영생의 양식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자신의 살과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심으로 그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6-17)고 합니다. 잔과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여 되어야 부활에도 참여 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님 오실 때까지 이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11:23-27)고 합니다. 이것이 성만찬으로 우리가 성례라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기가 아닙니다. 성도가 모일 때마다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 행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식으로서의 의미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이 무슨 의미인지 모일 때 마다 성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것이 성찬인 것입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3. 어리석은 자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이 영생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틈이 나면 그렇게 하겠다고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여유가 있으면 그때 이런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24:24-27)고 합니다.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서 자기 아내와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듣습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하여 듣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고 최후의 심판도 증거한 것입니다. 벨릭스는 유대의 총독이고 그의 아내도 유대 여자입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지금은 가라 틈이 있으면 너를 불러 듣겠다고 하면서 미루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을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2년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2년인데 우리는 예수를 믿은지 몇 년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여전히 믿음으로 뭔가 기대를 하며 말씀을 듣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돈을 바라다가는 그 돈과 함께 망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의와 심판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악인의 부활과 의인의 부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주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가 들은바 된 하늘의 소망을 바라며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살고자 하는 믿음을 구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오늘 본문의 벨릭스처럼 천천히, 틈나면, 나중에 들어 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 점검하셔야만 합니다. 그 주안에서의 분별이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의 의인의 부활에 이르게 할 줄로 믿고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울이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하는 것과 유대인들이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은 무엇입니까?

4. 사람의 선행과 악행을 따라 심판 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오늘 말씀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성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늘날 우리에게 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습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바울을 부르는 벨릭스의 의도와 같은 우리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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