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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도들의 삶의 우선순위

본문 / 25:13-22

 

 

1. 우선순위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선순위를 정하여 살아갑니다. 아마 중요하고 급한 것을 일순위로 정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 다음 순위로 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하고 급하다는 기준이 과연 누구의 기준인 것입니까? 나의 기준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기준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당연히 주님께서 중요하고 급하다고 하시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은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예배시간입니다. 우리가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분의 원하심과 뜻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예수님이 주인이라면 이 시간만큼 중요한 시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시간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적어도 이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에게 전화를 해보면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여러 가지 사정이라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다음에 드려도 되고, 말씀도 다음에 들으면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 집안의 중대사이기에 그 일을 해야 하고 그곳에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구의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8:18-22)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는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는 것에 대해 주님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말씀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이 세상이나 또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일을 죽은 자의 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혼식이든, 돌이든, 회갑이든, 장례이든 간에 생명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인데도 우리는 늘 마귀에게 속고, 자기 욕심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아직도 정하여지지 않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지난주에 살펴 본 벨릭스와 같은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인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4:25)고 합니다. 그런데 이 벨릭스가 무려 2년이나 바울을 연금시켜 두었지만 그 틈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교체되고 마는 것입니다.

 

2. 베스도의 시각

그 벨릭스 총독 다음으로 부임하여 온 사람이 베스도입니다. 이 사람이 가이사랴 총독으로 부임하였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겠다는 사람이 40명이나 되었는데 그 바울을 죽이려고 지금 새로 부임한 총독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자기가 가이사랴에 곧 내려가니 그곳에 와서 송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이사랴에 돌아온 베스도가 바로 다음날 재판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송사하는 자들이 여러 가지 송사를 하지만 그러나 형벌을 줄만한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9절에 보면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25:9) 하면서 바울에게 묻습니다. 바울사도가 자기는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 없으니 그들에게 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베스도도 유대인의 민심을 고려하여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로마시민권이 있으므로 로마의 법대로 상소를 하니 베스도가 어쩔 수 없이 가이사에 보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목숨을 유대인들에게서 구하고자 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3장에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가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러는 중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가이사랴의 베스도에게 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아그립바 왕에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 보고의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고의 내용을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죽여야 할 놈이라고 하여 무슨 흉악한 범죄를 하였는지 알아보려고 심문을 하여 보니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의 악행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부터 보면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25:24-25)고 합니다. 베스도 총독이 심문하여 본 결과 무엇 때문에 잡혀왔는가 보니 그들의 종교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25:19)고 합니다. 이러한 보고 내용이 어떻게 들립니까?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그렇게 요란을 떨고 있었다는 식입니다. 정말 로마를 반역하거나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아주 심각하게 처리하여야 할 문제이지만 단지 예수라는 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이야기는 그저 광신도들이나 하는 정신 나간 이야기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자기도 예수에 대하여 들었으니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러자 22절에 보면 베스도가 내일 듣자고 합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면 내일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들의 왕의 직분과 총독의 직분과 직결된 문제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소식이 어떻게 들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단지 1년에 한번 부활절에만 듣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날마다 가장 중요하고 귀한 소식으로 들리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신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중요한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사 놓은 주식이나 아파트 가격이야기 또는 우리 아이들의 학교 성적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지고 들려지는 이야기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껏 알고 있는 고난과 부활이라는 내용이 고난 주간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여 왠지 듣는 음악도 경쾌하고 밝은 음악이 아닌 장중하고 무거운 음악을 들어야 할 것 같고 또 마음도 그렇게 가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절이 되면 밝고 경쾌한 음악을 듣는 것으로 바뀌고 고난주간에 참았던 재미있는 일들을 행해도 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1년에 한번 고난을 생각하고 부활절 지킴으로 고난이 끝나버리는 느낌을 가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활과 함께 우리의 경제가 부활이 되고, 우리의 무엇이 새로워지는 것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시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본격적으로 십자가로 밀어 넣으시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 즉 영광의 영이 지금 누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자 위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시시한 이야기입니다. 광신도들이나 하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를 보고서 무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6:23-25)라고 합니다. 바울을 보고서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과연 미친 사람입니까? 아니면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정상적인 사람보다 더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정상적이라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와 아무른 상관도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에 그리고 그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그 예수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뭘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별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나 척척 해결하여 준다면 한번 믿어 주겠다는 정도이지 별 관심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복음으로 듣지 못하고 받아 들일수도 없는 것입니다.

 

3. 삶의 목표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기쁨의 소식이 됩니까?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7-11)라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공과 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그것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비추어 보면 쓰레기처럼 여겨지십니까? 반대로 아무리 실패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다른데 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려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이것이 빠져버리면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여전히 썩어질 것을 쫓아가는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2-19)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여전히 죄 가운데 붙들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 죄 가운데 있다는 증거는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를 그 안에서 해방시켜서 보이지 아니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3:1-4)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 언제나 하늘의 영광과 하늘의 소망과 하늘의 기쁨으로 매일의 삶이 그 나라를 준비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아버지의 장례 대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2.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을 가이사에게 상소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이야기 듣는 것을 내일로 미루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리에게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이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총독 베스도가 바울보고 미쳤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에게 있어야할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7. 주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8. 우리의 삶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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