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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소망을 말하지만 다른 소망을 꿈꾸는 자들

본문 / 26: 1- 8

 

 

 

1. 같은 소망 다른 내용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의 고소로 인하여 감옥에 갇혀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원래의 고소 내용, 즉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항한다고 하는 내용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증명되어서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 송사의 종교적 측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로서 예루살렘 성전에 관계된 일과 대제사장직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인들의 신임을 받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헤롯왕의 증손자가 되는 사람이기에 유대의 풍속과 모든 문제들을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26:3)라고 하는 것이며 또 바울은 그런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변론 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이 이렇게 체포되고 고소를 받는 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출신과 배경을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다 자기를 안다고 합니다. 자신의 종교 중에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를 따라 생활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심문을 받는 것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그 내용을 6절부터 보면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26:6-7)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에 자기가 심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바라는 것은 자기만 바란 것이 아니라 유대인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면서 얻기를 바란 그 소망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바라고 바란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지금 자신들의 형편은 힘이 없고 약하여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지만 그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들이 메시아를 소망하는 것처럼 자신도 같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이렇게 고소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환영해 주고 또 응원과 격려를 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민족이 그렇게 바라던 소망을 이야기하는 바울을 그들은 죽이려 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물론 각자의 소망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한다고 하면 오늘 말씀은 찬물을 끼얹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평소에 그렇게 소망하는 그 소망을 죄라고 정죄하는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증거 하는 이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되는지 아니 되는지를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자기도 처음에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얻어서 더욱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을 잡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권세와 위임을 받아 가지고 가다가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13절부터 보면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26:13-16)라고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을 주님의 종과 증인으로 삼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제까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던 사람이 이제는 오히려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도대체 무엇을 증거 하는 것입니까? 앞에서 말하였지만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22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26:22-23)라고 합니다.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을 증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바울은 같은 소망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같은 메시아를 소망하지만 그 메시아에 대한 내용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강한 이스라엘을 꿈꾸며 소망하지만 지금 바울은 그렇게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한 내용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일어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리라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지자들과 모세의 증거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러한 소망을 모두 간절히 기다려 온 것은 맞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패한 인생이요 저주받아 죽은 인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바울 사도는 아니라고 하며 그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도들의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소망의 내용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소망과 사도들의 소망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의 소망

유대인들의 소망은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메시아 왕국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 늘 관심사가 언제 주의 나라가 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할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소망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간 것입니다. 메시아 왕국은 이렇게 못 박혀 죽으시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 예수님은 실패한 것으로 보고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십자가 이전에도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제자들이 드디어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렇게 기다려온 소망이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은 이방인에게 까지 이 소망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바울이 고소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소망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가시적이고 메시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도들에게는 그러한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이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21)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 하면서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국가들처럼 영토가 있고 백성이 있고 왕이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주님께서 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이기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 안에서 그 나라가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성령이 임하고 나서는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싸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26:8)하면서 자기에게 나타난 살아계신 주님을 간증하면서 성경이 증거한 그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증거 하는 이 내용,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18절에 보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26:18)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내용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의 세계입니까? 이것은 믿음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알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어두움 아래, 죄 아래. 사단의 권세아래 갇혀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사단의 권세아래서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향하여 달려 왔던 우리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하시고 이제는 주님을 믿는 거룩한 무리에게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소망

오늘 우리의 소망도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눈에 보이는 소망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인가 하는 갈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갈림이 일어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점검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내일에 대한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웃에게까지 인색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제대로 소망을 받은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직도 이 세상의 신에 사로잡혀서 일생동안 죽음의 두려움에 붙잡혀 종노릇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2:14-15)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혈육에 속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데서 해방된 것입니다.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서 생명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죽음의 종노릇이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된다고 하는, 다른 회사는 다 문 닫아도 우리 회사는 든든해야 된다고 하는, 우리 사업은, 우리 가정은, 우리 교회는 망하지 아니하고 늘 번창해야 된다고 하는 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 죽음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쉼이 없습니다. 지금 어려움이 없어도 앞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생 내일에 대한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서 자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자기 스스로도 괴롭고 주변사람도 괴로운 것입니다. 늘 불평과 원망이 따르는 것입니다. 도대체 만족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자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내일에 대한 염려, 1년 후의 염려, 평생의 염려를 하고 있으니 어떻게 스스로를 졸라매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살아남기만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하여도 인색하고, 사람에게 대하여도 인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까지도 몇 년 동안만 눈 딱 감고 지금 내가 소망하는 눈에 보이는 것 이루기까지 좀 참아 달라고, 봐 달라는 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과 삶이 과연 영원한 소망에 들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도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 과연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서 담대하였습니다. 죽인다고 하여도 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죽어도 사는 세상이 있음을 알고 믿는 신앙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로 인하여 흔들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고, 원통함을 당하여도 넉넉히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이러한 일들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니, 소망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이니 하면서 목숨을 쉽게 끊고 마는 것입니다. 혹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으면서도 우리 가운데 아직도 그런 생각과 소망으로 살고 있는 분이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18-28)고 합니다. 지금 온 세상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로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이 주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믿고 기다리기에 성령께서 기도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조금만 더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오시리라 약속하신 그분이 영광중에 임하실 것입니다. 그 날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매일매일 그 소망 중에 살아간다면 우리의 기다림이 헛되지 아니하고 주를 뵈올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믿음으로 그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유대인들과 바울이 같은 소망이 있지만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 받기 전과 받은 후의 소망이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3. 유대인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와 주님이 설명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다릅니까?

4.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계신 주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소망과 성령 받은 자로서의 소망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6. 죽음의 종노릇한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생명의 부활신앙이 잇는 자들의 삶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8. 오늘날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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