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0,468
오늘 : 167
어제 : 287

페이지뷰

전체 : 78,736,364
오늘 : 797
어제 : 1,64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하나님의 진노와 믿음으로 사는 자

본문 / 1:18

 

 

1. 종교성

우리는 지난주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을 수가 없기에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17절의 말씀처럼 복음을 믿고 사는 것이며, 그리고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왔으니 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시각과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다고는 하나 그러나 악한 자보다 선한 사람이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악한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말없이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은 교육과 환경을 만들면 범죄가 더 많이 줄어들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환경운동도 하고, 생명운동도 하고, 민주화 운동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관론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인간들 스스로 만들어 온 인간의 역사를 통해 그 역사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가를 보면서 비관합니다. 그러한 비관이 강렬하여지면 자살을 하거나 또는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죽이고 나도 죽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에 대하여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드러내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졌지만 이루지 못한 상실감이 커서 그런 것이지 세상자체를 포기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또 사람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말하게 되면 복음이 아닙니다. 반쪽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준다고 하는 말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을 다 준다고 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시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더 능력이 많으니 하나님께 빌어야지 더 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전도를 하여도 참 복음의 또 다른 측면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서는 거의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옥이나 심판 그리고 죄라고 하는 내용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런 내용들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백화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온갖 문화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아주 실비로 문화교실을 왜 만드는 것입니까? 고객이 와야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백화점들을 앞 다투어 서로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처럼 지역민을 위한 문화교실, 독서실, 결혼식장등을 만들어 개방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유가 있고 남는 공간이 있으면 그렇게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호감을 주어서 예수 믿기 좋게 만들자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의 시각

성경은 이 세상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 한 이후에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기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죄악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7:8-17)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어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가 없는 상태라면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며 칼을 갈고. 활을 당기어 놓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죄악을 낳고, 재앙을 잉태하여 거짓을 낳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렇게 의가 없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아는 사람만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그저 예수 믿는다고 하여도 자기 편함과 자기 이익 그리고 자기 행복과 자기 마음의 만족만 챙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일들을 모두가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 그 일을 하는 대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면 아마 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12)라고 합니다. 누가 주의 이러한 진노를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의 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인 것입니다. 일평생이 주님의 진노아래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밖에 나타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엉뚱한데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허기져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무언가 더 산뜻하고 새롭고 신선한 것은 없는가 하면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엉뚱하고 거짓 된 것에 붙들려 그것이 진리하고 고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나타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18)라고 말씀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경건치 않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라는 기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종교를 가졌거나 또는 종교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두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간관계에서 법을 어길 경우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경건치 않음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불의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경건함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불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경건치 못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쏟아질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3. 경건치 않음과 불의

그런 경건치 않음에 대하여 19절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1:19-25) 세상의 사람들은 경건에 대한 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예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 속에서 불의한 일만 없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속에 있는 불의에 대해서는 26절부터 보면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26-32)고 합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불의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기, 수군수군 하는 것, 비방하는 것, 자랑하는 것도 다 불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강도나 살인 같은 범죄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것들도 불의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불의의 근원이 경건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기에 나오는 사상과 행위들입니다. 이것이 경건하지 않음이며 이러한 불경이 불의를 생산하여 내는 것입니다. 불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자신을 의롭다고 할지 모르나 경건치 아니함에 대하여는 생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기가 불의한 행위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이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에 보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고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아직도 회개할 자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결국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4:17-18)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믿는 자에게 먼저 심판이 시행이 된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함이 심판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을 순종치 아니함이 심판인 것입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1:17)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아니함은 곧 하나님의 의가 없는 상태이기에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날 유일한 길이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진노 아래 있기에 인간의 어떠한 선행과 이성의 능력과 도덕으로 무장을 하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불살라지기 위하여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하여 이렇게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8절 이하에 보면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에 타 버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라고 합니다. 불타 없어질 것들을 목숨처럼 붙들지 말고 그 구원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니 우리 모두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의의 나라입니다. 의가 없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날마다 더 풍성하게 체험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새로운 나라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들의 관점으로 보는 이 세상의 시각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2.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 교회가 그것을 위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3. 나님 보시기에 세상의 실상과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4.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는 어디에 나타난다고 하며, 우리가 그 진노를 피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이 보는 죄인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7.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이며 또 기 이유는 무엇입니까?

8.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아는 자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당하다고 하십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33 2024 요한계시록 56. (계 16:8-11) 회개하지 아니하는 인간들 관리자 2024.04.21 3
732 9월 9일 1부 / 하나님의 열심으로 중매하는 중매자 관리자 2012.09.09 1616
731 9월 9일 / 마가복음 19. (막3;20-30) 사하심이 없는 성령 모독죄 관리자 2018.09.09 100
730 9월 8일 / 마가복음 68. (막 12:1-12) 주인되기 원하는 악한 농부들 관리자 2019.09.07 83
729 9월 7일 / 사도행전34. (행8:26-40) 빌립을 통로로 하는 성령의 전도 관리자 2014.09.06 332
728 9월 6일 / 로마서 3. (롬1:8-13) 같은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들의 삶 관리자 2015.09.05 437
727 9월 6일 / 갈라디아서 20. (갈 5:16-18) 성령을 따라 행하라 관리자 2020.09.06 110
726 9월 5일 / 히브리서44. (히 11: 1-3)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관리자 2021.09.11 212
725 9월 4일 2부 / 주의 성찬에 담겨진 의미 2 관리자 2011.09.03 1909
724 9월 4일 / 로마서 51. (롬9:1-5) 바울의 큰 근심과 신자의 복 관리자 2016.09.03 260
723 2023 9월 3일 / 요한복음 15. (요 3:22-30) 요한의 기쁨 관리자 2023.09.03 12
722 2023 9월 3일 / 요한계시록 27. (계 7:4-8) 인 맞은 관리자 2023.09.03 8
721 9월 3일 / 믿음 2. (눅17:1-10) 믿음의 능력에 대한 오해와 진실 관리자 2017.09.02 153
720 9월 3일 / 마가복음 18. (막 3:13-19) 제자를 부르시는 뜻과 목적 관리자 2018.09.01 152
719 9월 30일 1부 /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에 하는 바울의 자랑 관리자 2012.09.26 1769
718 9월 30일 / 마가복음 22. (막4:1-9) 농부의 일하심과 그 결과 관리자 2018.09.29 99
717 9월 2일 2부 / 육신적인 자랑과 주 안에서의 자랑 관리자 2012.09.02 1539
716 9월 29일 / 야고보서21.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283 관리자 2013.10.06 10359
715 9월 29일 / 마가복음 71.(막 12:28-34) 서기관의 지혜와 신자의 삶 관리자 2019.09.29 113
714 9월 28일 / 사도행전37. (행9:19-31)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함 관리자 2014.09.26 60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