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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사

본문 / 1:24-32

 

 

1. 여호와 하나님

지난주부터 지금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을 계속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지 경건하지 못함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그 생각들이 허망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사람과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형상이란 꼭 어떤 개인의 숭배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격, 자손, 아내, 가정, 민족, 국가. 교회 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란 신의 일반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만이 참 신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서 모든 만물의 창조자 시며,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어 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하신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사도들이 구약의 여호와 호칭인 주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주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서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고 있는 일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만이 하실 수 있는 영생 주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이러한 주님을 모르고서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자기의 상상에 의한 신이기에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배는 무역선이기에 수 십 명에서 수 백 명이 타고서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모두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하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물건을 다 버렸습니다. 그들이 믿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다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장이 보니 배 밑에서 누워 자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선장이 그에게 말하기를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1:6)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장은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풍랑을 잠잠케 하여줄 그런 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가 이 풍랑이 자신을 인한 연고라고 하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와 하나님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이 배에서처럼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하나님, 자기의 신들을 다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여호와라는 이름도 압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구약의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고 신약의 예수님은 피조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고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도 역시 사람들안에 자기들만의 우상이 다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이름을 부르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부르고 있는 신이란 모두 우상인 것입니다.

 

 

2. 버려두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는 대로 내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어 버려두신 결과가 어떠한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어버려 두신 결과 모든 사람들이 다 우상숭배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나만 바라봐 달라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나를 위하여 주고, 나를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는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나를 무조건 사랑하여주는 부모, 선생, 친구, 목사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되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해당 되는 그 일을 자신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그대로 내어 버려두신 것입니다. 이대로 내어 버려두시면 이것의 계속된 연장이 그대로 지옥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두신 결과 우상숭배에 이어서 인간관계속에서 어떠한 불의들이 나오는지를 오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록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목록들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1:24)라고 합니다. 그리고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1:26-27)고 합니다. 여자나 남자나 그 몸을 순리대로 쓰지 아니하고 역리로 쓰는 것입니다. 이러함으로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적인 타락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만연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적인 타락은 단지 육체적인 동성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변질이 되는 것입니다. 신전에서 신전창기와 미동들이 있어서 이방신의 제사와 함께 성적인 혼음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이 목적과 뜻을 따라 만드신 모든 것들을 그 만드신 이의 뜻대로 쓰지 아니하고 자신의 유익을 따라 쓰는 모든 것들이 타락인 것입니다. 미움은 죄를 미워하는데 쓰고,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는 것이 순리인데 그것을 거슬러 미움을 이웃을 미워하는데 쓰고, 사랑은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데 쓰는 것이 다 타락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에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의 정욕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초적인 죄의 뿌리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 이후로 모든 자연적 출생의 인간은 죄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죄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러자 합당치 못한 일이 인간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목록들이 모든 불의라고 합니다. 이러한 불의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목록들이 나에게 해당된다면 나도 하나님의 진노아래 저주아래 있는 것이며 이미 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록을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29-32)고 합니다. 이러한 목록들에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가지는 해당이 되고 몇 가지는 해당이 되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전부 해당이 다 되는 것입니까? 혹 나는 살인은 하지 않았으니까. 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 중에 단 한 가지라도 해당이 된다면 우리는 다 범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죄인이면서도 자기 잘난 체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러한 죄들이 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알고 있고 말하고 있으면서 자기도 행하고 그렇게 행하는 남도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함이 잘못인줄 모르기에 자기들이 하는 일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어떤 일을 의논하고 계획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기 말이 통하지 아니하면 어떠한 마음이 듭니까? 순복하고 따릅니까? 아니면 뒤에서 딴소리 합니까? 자기의 뜻과 다르더라도 순복하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다른 소리 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장하는 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이 더 옳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주장과 자기 합리화로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절대로 죄는 혼자만 짓지 않습니다. 같이 짓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도 행하면서 그렇게 하는 다른 사람들조차 옳다고 말하며 같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다 아는 것처럼 죄의 삯은 사망”(6:23)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여기의 목록 중에 단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시기가 없습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지 않습니까? 남이 잘되면 은근한 시샘이 나지 않습니까? 똑 같은 일을 하여도 자기가 한 일을 좋게 보면서 남이 한 일은 깎아내리지 않습니까? 비방하지 않습니까? 자랑하지 않습니까? 수군수군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영원한 지옥형벌로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안에 가득하면서 천국 보내 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천국을 간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어버려 두신 결과인 것입니다.

 

 

3. 눈물 없는 신앙

어느 목사님이 로마서 1장 설교 중에 사람이 쥐와 같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성도가 대단히 화가 나서 그 말을 취소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로마서를 설교하던 그 목사님이 그 사람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당신이 참 옳습니다. 사람을 쥐에다 비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공정합니다. 나는 정말 사과합니다. 나는 쥐에게 사과합니다. 쥐들은 쥐가 행동해야할 짓만 하는데 사람들은 사람이 행동해서는 아니 될 짓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물도 안하는 짓을 하며 동물보다 더 나쁜 짓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쥐에게 사과합니다.”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를 알리요?’ 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지은 인간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이 스스로 개선되거나 구원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즉 나라는 인간에 대하여 알게 되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의 악함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이 문제고 그런 자신의 죄를 보니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7:17)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께서 씻어 주실 눈물이 있기는 한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 어린 양이 환난에서 나온 자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씻어주신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런 눈물을 흘린 적이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흘린 눈물이 없다면 씻어줄 눈물도 없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돈이 없어서 고생하며 흘린 눈물이 아닙니다. 흔히 고생을 하는 사람을 위로할 때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그 눈물을 다 씻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자식 때문에, 돈 때문에 설움을 당하고 흘린 눈물도 하나님이 다 씻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흘린 눈물은 돈만 있으면 씻어집니다. 자식 때문에 흘린 눈물이라면 자식이 잘만하면 당장에 씻어질 눈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씻어주실 눈물은 돈으로도, 성공하는 자식으로도 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흘린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흘린 눈물이기에 주님에 의해서 씻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과연 나에게는 어린 양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흘린 눈물은 있고, 자식 때문에 흘린 눈물은 있는데 어린 양 되신 예수님 때문에 흘린 눈물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눈물이 없는 이유는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예 주님의 고난에 관심도 없고 또 고난과 상관이 없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고난에 마음을 두고 사십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은 주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신자로 부름 받은 우리가 주님의 인생에 동참되어진 자로서 그 고난에 참여할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고난을 요구하는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만 세상에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일을 안다면 고난으로 인도하는 주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이해해주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흘려지는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자기 문제로 인한 눈물은 얼마든지 있지만, 주님 때문에 흘려지는 눈물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씻어주실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예수님 때문에 고통 받아서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 죄를 보고서 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나오는 것이 죄 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감히 천국을 바라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논을 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약속 안에서 결정하신 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수를 믿고서 우리에게서 이러한 부분들이 많이 고쳐졌습니까? 아니면 가끔씩이라도 나오고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TV나 컴퓨터 화면을 보면 잘 모르지만 사실은 작은 떨림이 그 화면이 있습니다. 화면의 떨림이 느리면 떨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지만 더 빠르게 되면 떨리는 지도 모르며 사는 것입니다. 형광등의 불빛도 파장으로 되는데 너무 빠르기에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죄악에 푹 젖어서 살고 있으니 죄 인줄도 모르고 서로 옳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자들이 우리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실상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잊는 순간 우리는 지식으로 교만하며,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잊지 않으면 오직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점검하시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제자들이 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약의 명칭을 예수님께 붙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풍랑을 만난 배의 선장이 말하는 하나님과 요나가 말하는 하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우상숭배자들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대로 쓴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우리에게 불의가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 앞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서 드러나는 불의한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7.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의 실상은 어떠하며 또 그것을 알게 된 자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8. 주님이 닦아주실 눈물은 무엇이며 또 우리에게 그런 눈물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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