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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본문 / 2: 6-11

 

 

1. 심고 거둠

우리나라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이 세상의 아주 보편적인 삶의 원리로 한마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또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무언가를 심고 거두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심고 거둠의 기간이 짧은 심음과 거둠이냐 아니면 긴 심음과 거둠이냐는 것뿐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서 반드시 한번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런 심음과 거둠에 대하여 창세기 8장에 보면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이 법칙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음과 거둠은 또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고 합니다. 인간은 살면서 심고 거두며 살아가게 되는데 두 가지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육체를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인 것 인줄 알고 심고 거두는 사람은 결국은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썩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전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계속하여 썩어질 것만을 심고 거두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심고 거둠은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원하지도 않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가지의 원리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육체만을 위하여 심고 거두며 살았는지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며 살았는지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기준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조건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특권으로 여긴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할례를 행하였고, 율법을 따라 온갖 것을 다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특권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군에서 단체 기합을 받을 때에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과 같은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하나님께 항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보며 믿는다는 우리는 오늘 과연 무엇을 심고 있는 것입니까?

 

 

2. 우리의 모습

이 역시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2:7-8)라고 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고 합니다. 영생이냐 분노냐 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고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것에서, 선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란 세상의 썩어질 것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입니다. 썩지 아니하고 영원한 주님의 나라와 그 기업의 영광, 주님의 영광과 존귀, 주님이 하신 일의 영광과 존귀입니다. 날마다 이것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믿는다고 하면서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직접 기도하여 구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소원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니 직접 구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쏠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일과 그 영광을 구하는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돈 버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생과 천국이란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와 분노란 당을 지어서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 임할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일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하는 불의도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당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온통 당 짓은 것으로 이루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연과 혈연 그리고 지연과 같은 것으로 똘똘 뭉쳐 유유상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 짓는 재미로, 편 가르는 재미로 사는 것이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 가운데서도 나는 그런 당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자기는 무소속이라고 하겠지만 실상은 무소속이라고 하는 당을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당 짓는 일이 어디에서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로마인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고 민중들까지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이 당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영생은커녕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죄악도 유대인들의 죄악도 우리에게는 다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방인의 죄악인 로마서 1장의 내용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죄악인 로마서 21절부터 320절의 내용도 우리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건하지 못함과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불의만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왜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고, 전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에 의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가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다윗은 복 있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오히려 악만 행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3. 믿음으로 행함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오래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모두가 썩어질 것을 구하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썩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자가 이러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일의 열매를 나타내게 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자랑할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각각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다고 배웠기에 정말 열심히 주를 위해 산다고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16:27)고 하셨기에 우리는 밤낮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가시고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생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이 모든 것을 보상 받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 있는 말씀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행함을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적 실천으로 이해한다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행함과 믿음이 아닌 행함을 구분할 분명한 기준을 세울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한다면 분명한 기준이 생깁니다. 앞에 있는 25절을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행함의 기준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한 행함은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한 것과 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다시 말해 누가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살았고, 누가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로 살았는지 그 행함을 따라 갚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버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오셨을 때 생명으로 갚아주시고,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오직 자신을 위해 살면서 예수님을 버린 사람은 하늘의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실천을 무작정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이라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라면 믿음과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생명을 잃은 것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고 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실천을 해야 합니까? 실천을 해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합니까?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나라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죽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실천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같은 실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함을 육신적 활동과 실천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이 말씀 하신 행한 대로라는 말씀은 활동과 실천보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그 전제로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자라면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이 오셨을 때 생명을 얻는 행함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주와 함께 살리심을 입은 자라면 떠나든지 거하든지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 자들인 것입니다. 디도서 3장에 보면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3:1-11)고 합니다. 여기 3절을 보시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울 자신도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를 입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 의에 대하여 자기 행함에 대하여 기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인간적으로는 결코 성취되지 아니하는 것이기에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인 조건을 찾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서 어떠한 선행이 나오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바울사도의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고백처럼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왔다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란 자기에게서 나온 선행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짐짓 겸손하여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기에 나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기 의를 드러내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죽기까지 충성하고서도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왔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기적들이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하며 또 그 기적의 열매를 매일 맛보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살며 행하는 심고 거두는 일의 두 가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나님이 이 두 가지 원리를 갖고 심판하심에 대해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주를 믿는 자임에도 그 삶에 있어 나누어지는 두 가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나님의 영생을 누리는 자들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5. 말씀을 통해 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깨닫게 된 것입니까?

6.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7. 성경에(주님께서) 말씀하신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우리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행위도 은혜라고 하는 까닭과 그 은혜를 아는 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어떤 모습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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