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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송사와 변명
본문 /  롬 2:12-16

 

 

1. 율법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처럼 영생을 위하여 사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면서 사셨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며 사셨다면 영생을 얻을 것이요, 당을 짓고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며 살았던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스스로 썩지 아니할 영광을 구하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 썩어질 영광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렵혀지지 아니하는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기에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즉 인간의 어떠한 외적인 조건이나 공로를 따라 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가장 큰 반발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 자신들이 보기에는 개와 같은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 한다는 것에 대하여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받지 않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도 받지 아니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심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2절부터 있는 유대인들부터 보면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2-13)라고 합니다.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율법을 받은 자는 율법을 받고 들은 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킨 자가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과연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될 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주신 것입니까? 율법은 범죄 함을 인하여 죄로 심히 죄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방인들은 받아도 지킬 수 없기에 주지 않은 것이고, 자기들은 특별하기에 율법이 주어졌고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기에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전체에서 드러난 결론은 그들이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고 합니다. 율법은 율법을 다 지키다가 어느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다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인데 과연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서 아무리 율법의 조문을 외우고 다 지킨다고 하여도 그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야고보서의 말씀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에서 차별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자신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서로 서로 차별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알라고 주신 율법으로 자기들은 정당화하면서도 남들은 그 율법으로 정죄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2. 송사와 변명
이처럼 율법은 고발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이 송사(판결을 요구함)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받고 율법을 아는 사람일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송사에 대하여 스스로 변명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율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자기 정당화를 위하여 율법을 재해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해석과 적용이 얼마나 엄청난지 유대인들의 지혜와 가르침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탈무드의 방대함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이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책인데 율법의 해석과 적용과 삶의 모든 구체적인 행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랍비들의 해석을 따라 어떤 것은 아주 강직한 율법적 해석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관용과 사랑의 해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자기들에게 유리한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즉 송사와 변명이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은 어떻습니까? 과연 율법이 없으니 심판도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을 범함으로 심판을 받고, 율법이 없이 범죄 한 자는 율법 없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범죄 하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통하여 범죄를 알게 되지만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은 어떻게 범죄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본성과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고 합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본성과 양심이 자신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으로 인하여 스스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송사 받고 변명을 하지만, 이방인은 양심으로 송사를 받고 변명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방인은 자기 본성에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고, 이방인은 양심을 곱게 쓰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 율법을 지키거나 양심을 지킨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면 모두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청년들 수련회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곳에서 하지만 그때만 해도 대형 본부석 텐트와 작은 숙소용 텐트를 설치하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전기도 끌어 오고, 식수도 날라다 먹고, 야외 화장실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첫째 날 저녁 식사 때 쯤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기진맥진인 것입니다. 문제는 식사 당번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서 같이 먹고 난 후입니다.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다들 힘들고 배부르고 하니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들 하느냐 하면, 자기는 차에서 무거운 짐을 날라 왔기에 설거지를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자기는 시장을 봐 왔기에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누구는 텐트를 설치했기에, 누구는 저녁 준비를 했기에 등등 하면서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하라는 송사에 대하여 각자가 변명과 변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른들이라면 속으로 감추기도 하겠지만 젊은 청년들이니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내리는 결론이 제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끊임없이 송사와 변명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는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언제나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고, 재판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 동일합니다. 자신은 무죄고 나 이외에 다른 모든 사람은 다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자는 자기의 양심으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살고 있습니까? 역시나 자기 자신이 스스로 율법이 되고 판단의 기준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에 빠지거나 또는 교회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어떤 송사나 변명이 나오고 있습니까? 전에는 율법의 기준에서 송사를 하고 변명을 했습니다. 주일 성수를 못했다고 또는 믿음이 없어 못했다고 하면 별 할 말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며 용서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일이라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하니 또 봉사라는 행위 자체가 믿음이 아니라고 하니 혹 스스로 자유를 빙자하여 방종 하는 삶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안다고 하는 지금은 복음을 가지고 송사도 변명도 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흔한 예로 주일에 예배를 빼 먹으면 ‘너 예배 빼 먹고 뭐하고 있는 거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와 변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남들이 그렇게 하면 다 유죄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주 정당한 근거를 스스로 만들어 내어 변호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가난하다거나 더 급한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율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여 송사도 하고, 변호도 하고, 판단도 하고 있으니 성경은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명 중에서 이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또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여전히 그 중심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정당성으로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에서는 끊임없이 송사와 변명이 계속되고 있지만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판단
그런데 전혀 그러한 송사와 변명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모스에 의하면 거짓된 종교적인 확신과 경제적인 안정을 인하여 스스로 든든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회개를 외쳐도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양심의 화인을 맞은 사람처럼 송사와 변명도 없이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살면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18-20)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였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받았음을 증거 하면서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파선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다음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보면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1-5)고 합니다.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양심에 사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 됩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먹지 말라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새로운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발로 밟은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들 안에서 진리다 아니다 또는 옳다 그러다 하는 송사와 변명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그러나 무엇으로 바른 판단이 나오게 됩니까?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2:16)고 합니다.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누가 옳은지 그런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판단하면 모든 것이 백일하게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은밀한 것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복음은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모든 사람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지금 세우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이 그래도 나오는지 아닌지를 복음을 통하여 지금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까지의 자기 송사와 변명이 다 무너지는 사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양심을 곱게 가지고 살았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이 임한 사람이며 복음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의 모든 죄악의 지적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아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기는 자기변명에서 이제는 모든 말씀이 다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목록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사람은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를 위하여 말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행위로 대체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물론 믿는 사람에게도 로마서 7장처럼 죄냐 의냐 라는 싸움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송사와 자기변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삶만이 자신에게 기쁨이며 소망임을 알기에 언제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판단하며, 그 안에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원가족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반발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의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3.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과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송사에 대하여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4. 우리 스스로가 하는 송사의 결론은 무엇이며, 그러한 결론이 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듣고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인간들 속에서 송사와 변명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7. 송사 앞에서의 바른 판단은 언제 이루어지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8. 복음을 믿는 자의 특징과 그 증상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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