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6,833
오늘 : 201
어제 : 308

페이지뷰

전체 : 78,765,478
오늘 : 804
어제 : 1,3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

본문 / 5: 5-11

 

 

1. 헛된 소망

인간관계 속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한다고 하는 말에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무엇으로 확인을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이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과연 이런 내용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확증이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5)라고 하여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소망이라는 말씀은 4절에서 나타난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이뿐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환난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소망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소망이기에 환난을 통하여 썩어질 소망을 피하여 썩지 아니할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으로도 끊을 수가 없는 소망이 성도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소망이 부끄럽지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또 복음으로 주어지는 소망도 부끄럽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우리가 이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소망이 아닌 세상에 속한 헛된 소망을 가졌다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오만 원짜리 한 장이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오가는 사람들은 있는데 그것을 본 사람은 자기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는 척 하며 그 오만 원짜리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람의 왕래가 적어지면 살짝 주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들겠습니까? 이 돈을 내가 주워서 가져도 되나 안 되나 하면서 마음은 쿵쿵쿵 뛰고, 눈은 요리 저리 돌리며 별별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때가 되어 살짝 주워들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오만 원짜리 지폐 위에 무슨 도장이 하나 찍혀 있는 것입니다. 가짜 돈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도 얼굴은 붉어지고 창피해서 뒤도 안 돌아 보고 빠른 걸음으로 그 장리를 도망가듯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가져도 되는가? 안 되는가? 그러나 기대하고 확인을 하였더니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때 자신이 돈 오만원에 마음이 팔린 것이 부끄럽고 또 진짜 돈이 아니라는데 실망도 되고 그래서 부끄러워 도망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가운데 이런 소망의 내용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평생 악착같이 이루었다는 꿈과 계획과 인생의 목표들이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 헛된 욕망에 붙들려 진짜라고 쥐고 보니 막상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허무감을 전도서 1장에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헛된 소망으로 살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소망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주신 소망은 결코 부끄러운 소망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도 없어지더라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확증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5)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여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과연 사랑인가 하는 것에서는 다시 생각해 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자기백성에게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늘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요즈음 말로 하면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그 약속대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이, 우리가 연약하여 경건치 아니할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8절에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고 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고쳐먹고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하는 이런 마음을 먹기도 전에 이미 연약하고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에 하나님에 대하여는 그 어떤 반응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0절에도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고 합니다. 우리의 죄인 된 상태란 곧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준비하여서 화목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하여 7절에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5:7)라고 하여 흔히 말하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은 자들을 혹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죄인이며 원수 된 자를 위하여 누가 죽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아직 연약하고, 아직 죄인 되고, 원수 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는 없는 전혀 다른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9절에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5:9)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아들의 피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 진노를 그 아들에게 쏟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사랑 앞에서 무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11절에 보면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의 복입니다. 이 사랑만 있다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그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것은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이며,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처럼 그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 안의 주의 사랑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이 새 언약을 세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2:19-20)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유월절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리시는 것임을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성찬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잘못된 성찬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전11:17)고 합니다. 왜냐하면 18절부터 보면 분쟁이 있고 파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11:20)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도대체 어떤 분쟁과 편당이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이미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누가 십자가를 졌는가 하면서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당을 만드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몸을 나누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목회한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온갖 다툼, 분냄, 당 짓는 것, 중상함, 수군수군 하는 것, 거만함, 어지러운 것, 더러움, 음란함, 호색함 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 중에 성찬식과 함께 행하여진 잘못된 일이 무언지를 보고자 합니다. 다시 고린도 전서 11장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7-29)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살피지 않고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례를 받고 주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늘 고민이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성찬을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래가지고 성찬을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은데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셔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는 말씀하는데 과연 받고도 내가 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죄인이기에 더욱 주의 살과 피가 필요하기에 감사함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왜 책망을 하는 것입니까? 초대교회에서는 저녁 공동식사와 성만찬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까? 교인들 중에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은 저녁 일찍 모여 공동 식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늦게 마치고 공동식사에 참여하니 남은 것을 겨우 먹든지 먹을 것도 없는 반면에 일찍 온 사람들은 먹고 마셔서 배부르고 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어떻게 성만찬을 행하는가 하는 책망입니다. 20절부터 보면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11:20-22)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 먹고 마신 것입니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해 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늦게 오니 먹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우리도 매주 공동식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은 과연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친한 사람만 챙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처음 온 사람이든지 누가 챙겨줄 연고도 없는 사람이 점심식사 시간에 편하게 먹을 수가 있습니까? 수련회를 하든, 야외를 나가든, 다른 무슨 일이든지 우리 안에 고린도 교회가 책망 받는 내용이 우리에게는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편당의 모습이고 주님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몸을 온전히 헌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는데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교인들은 주님께서 동일한 피를 흘려 값을 주고 사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먹고 마셔서 배가 부르고 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며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1절부터 보면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1-32)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핀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하여 집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연약한 형제자매를 멸시한 것이 우리가 살펴야 할 내용입니다. 이런 판단을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이런 판단을 지금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래야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의 성찬을 행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책망이 우리의 책망이 아닙니까? 요한일서에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였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의 피로 인하여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부어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주의 살과 피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무슨 생활을 하든지 주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주의 성찬은 주의 말씀을 듣고 먹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일이 진정한 주안에서 성찬입니다. 그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과 모습인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확증된 자라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세워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충분히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런 주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주의 그 사랑으로 지배와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심으로 적어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는 다른 무엇으로 말미암아 차별되는 사랑이, 형제를 업신여김으로 교회를 업신여기는 어리석음이 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말하고 표현하는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무엇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까?

2.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5.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의 삶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6. 성찬식은 어떤 의미이며,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진 잘못된 성찬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의 몸과 피에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 당시 고린도교회의 배경은 무엇이며, 그러한 내용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8. 주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지체들을 멸시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39 11월 15일 / 추수감사주일 (레 23:33-36) 교회의 추수감사절과 성경의 수장절 관리자 2015.11.14 917
538 11월 29일 / (마 4:1-11) 예수님의 시험을 통해 보는 우리의 현실 관리자 2015.11.28 917
537 6월 19일 / 로마서 41. (롬8:5-8)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관리자 2016.06.18 897
536 6월 29일 / 사도행전25. (행6:1-7) 집사를 세워 문제를 맡기는 사도들 관리자 2014.06.28 879
535 6월 12일/ 로마서 40.(롬8: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관리자 2016.06.11 877
534 2월 22일 / 사도행전57. (행16:25-34)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관리자 2015.02.17 826
533 9월 14일 / 사도행전35. (행9:2-9) 사울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뜻 관리자 2014.09.14 803
532 4월 5일 / 부활주일 / 에스겔 37:1-14 골짜기에서 살아난 마른 뼈와 부활 신앙 관리자 2015.04.04 803
» 2월 14일 / 로마서 24. (롬5:5-11)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 관리자 2016.02.12 791
530 9월 20일 / 로마서 5. (롬 1 : 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관리자 2015.09.19 787
529 4월 26일 / 사도행전65. (행20:1-12)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나타난 하늘의 위로 관리자 2015.04.25 785
528 11월 23일 / 사도행전44. (행12:19-25) 가이사랴에서의 헤롯의 죽음 관리자 2014.11.23 782
527 12월 13일 / 로마서 15. (롬3:19-22) 율법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관리자 2015.12.11 777
526 10월 18일 / 로마서 9. (롬 2:1-5)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관리자 2015.10.17 776
525 7월 27일 / 사도행전 29. (행7:44-53) 성전에 담긴 하나님의 뜻 관리자 2014.07.26 771
524 5월 10일 / 사도행전67. (행20:28-38)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살피는 감독자 관리자 2015.05.09 739
523 10월 5일 / 사도행전38. (행9:32-43)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주님의 일하심 관리자 2014.10.05 722
522 4월 24일 / 로마서 33. (롬6:15-18) 죄의 종과 의의 종 관리자 2016.04.22 722
521 12월 14일 / 사도행전47. (행13:13-31)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 관리자 2014.12.13 714
520 2월 28일 / 로마서 26. (롬5:12-17) 죄와 사망의 세계와 의와 생명의 세계 관리자 2016.02.27 714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