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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본문 / 5:18-21

 

 

1. 율법의 역할

오늘 본문 20절에 보시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율법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덜 나왔을 죄가 율법이 들어 온 뒤에는 없던 죄까지도 더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더하여 지는 것입니까? 율법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이 죄인에게 들어오니 어떤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까? 자기들은 잘 지킨다는 것으로 자기 의를 삼는 경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은 무엇을 하라고 하면 평소에 잘하던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하던 일도 멍석 깔아주면 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평소에 잘하던 일을 하라고 하는데도 시키니까 기분 나빠서 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을 텐데 하지 말라고 하니 더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율법을 가입시켜서 죄를 드러내지 말고 바로 구원하시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보일 텐데 죄가 무엇이 좋다고 다 들추어내어야 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20절의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 넘치는 은혜를 보이시기 위하여 죄가 더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데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더 복잡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의 경우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언제 다 드러납니까?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첫 장면과 첫 회부터 다 드러내지 않습니다. 물론 드러낼 의도는 이미 마음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치밀한 구성을 깔아놓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작가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진행을 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잘 하는 작가가 위대한 작가이고 작품성이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서 가장 최고로 드러나는 것입니까? 바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바로 예수님이 와 버리시는 것과 구약의 그 많은 불순종의 사건들이 다 터져 나오고 난 후에 오시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능력의 극대화인 것입니다. 죄를 모르고는 은혜를 모릅니다. 더러움을 모르고는 깨끗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를 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아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서 만지지 못하게 하셨을 텐데 어떻게 저런 죄인을 그대로 두는가,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속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비유를 들어 저들에게 말씀합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7:41-42) 이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 시몬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7:43)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주께서 네 판단이 옳다”(7:43 )하시고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여기에 모였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인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주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많이 사함 받은 자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알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죄보다 더 크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처럼 평소에 자기는 죄인이라고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상당히 기분 나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 여인에게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야 말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기쁜 소식 앞에서 그 여인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저런 더러운 여자가 어디에 감히 나오는가 하는 비판과 조롱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죄가 더한 곳에 더욱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바로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하는 한 더러운 여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용서의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한량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취지가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죄인 인줄 모릅니다. 이것이 사망의 왕 노릇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인 이 여인은 의가 왕 노릇하는 하는 세계에 들어왔기에 용서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 아들의 피로 의롭게 되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지를 성경을 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일하심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4:21-23)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면서 자기의 장자 만들기에 나서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어 놓아라 하려고 모세를 보냅니다. 여기 모세를 보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모세를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바로를 바로 죽여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능력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을 빼내어 오시는 일을 그렇게도 복잡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지 말고 단 한 번 만에 일의 해결을 보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열 재앙 중에서 바로의 술사들이 흉내 내지 못한 것이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부터였습니다. 바로의 술사들도 흉내를 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바로가 손을 들고 항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엇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까? 장자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번째까지 가는 것입니다. 열 번째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입니다. 중간에 바로가 항복하면 안 되는 것이기에 바로는 장자의 죽음까지 완악하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열 번째 재앙에서 바로에게 속한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다 죽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출발하는 것이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1-5)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바다를 건넘으로 세례를 받고, 만나라는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반석에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민수기 1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14:20-23)고 합니다. 바로의 완악함이 열 번을 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열 번이나 반역합니다. 열 번이란 더 이상 없다는 의미입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것은 넘어갈 때까지를 열 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로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이 완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로는 망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이 성취되는 일에 어린 양의 희생이 있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며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의 완악과 같은 이스라엘의 완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완악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을 염려하고,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나온 것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악과 완악이 드러나게 예수님께서 조치하십니다. 그저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러시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한다는 자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종 되었던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의 아비가 다 마귀라는 증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애굽 왕 바로는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시행되니 완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애굽의 바로 왕보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더욱 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니 그들의 완악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약이 시행되는 곳에 인간의 죄가 드러나고 그 죄로 인하여 희생당하는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어린 양의 희생이라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3. 넘치는 은혜

바로왕의 완악함과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어져 나오듯이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까? 바로나 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나 다 동일하게 완악한 죄인입니다. 자신이 완악한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셔서 때가 되어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에스겔 16장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60-63)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온갖 죄를 다 용서받았습니다. 용서받고 나니 자신의 죄가 부끄럽고 놀라워서 입을 다물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용서의 위력을 알게 되기에 그 은혜만 자랑하게 됩니다. 그 용서의 세계가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지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47:1-12)고 합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옵니다. 이 물이 점점 많아져서 강물이 되어 흐릅니다. 이 물이 가는 곳에 죽은 것이 살아납니다. 성전은 언약궤가 있고 속죄의 제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 본 예루살렘의 성전에는 온갖 더러운 우상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 성전은 파괴됩니다. 우리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의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 생수가 더욱 더 점점 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 되셔서 자기 피로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보혈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한량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하고 겨우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명수가 차고 넘쳐서 그 안에 잠겨버리는 것입니다.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진 것입니다. 이것이 의와 생명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본문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친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믿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보다 더욱 넘치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과 동일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동일한 찬양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를 만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오직 주의 은혜와 나의 죄인 됨을 깊이 인식하며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런 자만이 허락된 주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감사와 찬양의 사람을 살아 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런 주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죄인들에게 나타나는 죄의 특징 중의 하나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죄를 다 들추어내시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나님의 말씀이 어떤 자에는 듣기 싫은 말이고 또 어떤 자에게는 복음이 된다고 합니까?

4. 이스라엘을 구원하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5. 바로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이 10번이나 완악하고 반역함에도 그 결과가 다른 까닭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 되는 곳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하나님의 언약으로 용서 받은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반응과 증상은 어떤 것입니까?

8. 에스겔의 환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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