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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혜의 왕 노릇하는 나라에 속한 자들

본문 / 5:19-21

 

 

1. 땅의 개념과 하늘의 개념

우리는 죄의 문제를 이야기 하면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항상 큰 죄와 작은 죄를 분리하여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인 살인죄는 큰 죄이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을 하는 것보다는 작은 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하늘의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고 합니다. 즉 하늘나라의 살인의 개념의 이 땅의 살인의 개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선 사람에게 상해를 입혀 그 목숨을 빼앗아야만 살인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욕을 해도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요한일서 3장에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미움이나 살인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 같은 것입니까? 둘 다 미움에서 나왔기에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죄가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사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가 옳고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렇더라도 그 선행이 자신을 죄를 깨끗케 하지 못하며, 사망에서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안에서는 그 또한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로 의가 왕 노릇 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평생 헌신하고 순교까지 한 사람과 평생 강도짓하고 살인하다가 죽는 순간에 예수 믿어서 천국 간 사람하고 의롭다 하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세계입니다. 의가 왕 노릇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 역시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는 인간이 무슨 짓을 하여도 죄의 결과인 사망 외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곳이 듯이, 의가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느 인간도 누가 더 의로운가의 경쟁이 무의미 한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의가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 자기의 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왕 노릇에 대하여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고 합니다.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어느 소속이냐에 따라 죄인이냐 의인이냐의 문제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속을 내가 결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의와 생명의 권세로 들어오는 것이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인지를 확인하여 보고자 합니다.

 

 

2. 은혜의 왕 노릇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목표로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라고 하여 아들의 영광을 목표로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은 진노의 그릇으로, 어떤 피조물은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나 모두가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속죄를 입은 자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그 속죄를 입지 못한 자들은 지금 주를 대적하다가 마지막 재림의 날에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 무릎 꿇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함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7-8)고 합니다. 사도요한이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변경 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모든 자들이 다 영광을 돌립니다. 한편은 주님의 피로 죄에서 해방된 자들로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주께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 자들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인데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는데 이들은 애곡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명한 말씀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영벌과 영생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왕 노릇,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를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하고 부랴부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와 상관없이 창세전에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살았던 에덴동산은 의의 상태가 아니겠냐고 하시겠지만, 사실은 죄를 짓기 전에는 의가 왕 노릇하는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죄가 없어서 무흠한 상태이지만 죄가 나오고 나서야 의가 왕 노릇 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인 고린도후서 5장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19절에 보시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께서 죄로 삼아버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는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에서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일한 대로 받는 삯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죄를 알고 자기 의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할 때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우고, 우리를 의로 여기시고 천국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더하게 하셔서 자신의 의에 대해서 포기하게 하시고 은혜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죄를 앎으로서 은혜가 더욱 넘친 자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5:21)고 합니다. 은혜가 넘친 자에게는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것은 사망 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은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기에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나를 붙들어서 영생에 이른다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가 왕 노릇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구원을 위해서 보태야 할 우리의 노력이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은혜로 구원을 얻으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라는 반문을 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행위를 자기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미련하고 완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럴 때 실패하지 않으시고 사망을 이기신 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죄가 신자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과 영혼과 운명은 주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간섭하시고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내어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신자는 은혜에 끌려가는 자입니다. 내어놓을 것도 은혜뿐인 자들입니다. 은혜로 살아가고 은혜로 천국 가는 그 기쁨과 행복함을 내어놓으십시오. 그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것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한들 그것으로 이미도 우리가 받은 영생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은혜가 왕 노릇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적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나온 자들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장차 어떻게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할 것인가를 보여주신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원수를 멸하시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마귀를 멸하여 의와 생명의 왕 노릇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 은혜의 왕 노릇이 어떻게 구약에서 펼쳐지는지를 몇 곳을 보겠습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은 성취가 되어서 수많은 아담의 형상들이 지상에 등장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5:3)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모양으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인간의 범죄는 그 하나님의 모양은 잃어버린바 되어 이제 남아 있는 자기 모양 즉, 아담의 모양과 같은 아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아담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죄는 더욱 관영하여 져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할 뿐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관영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 사건이 바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멸되지 아니하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만들었기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방주를 만들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왕의 권세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왕 노릇하기 위한 희생이 있습니다. 그 희생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었습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기 위하여 은혜를 제공하는 쪽에서의 희생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도 보면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냅니다.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브라함의 생애가 창세기에서 그렇게 많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곳에서 쪼갠 짐승사이로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구경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타는 횃불로 쪼갠 사이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죽음으로 대신하겠다는 언약 체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무엇인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일방적인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자식이 떼를 써서 아버지가 진 것이 자랑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이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어느 신이 인간에게 져서 죽는 신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것을 언약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0-58)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최종적인 모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내용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관이나 확신들이 다른 말들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자에게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움이나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실패가 두려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와 생명에 대하여 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의와 생명을 주신 분에게로 우리의 관심이 집중이 되고 우리의 가치관과 모든 것이 고정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세계가 우리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그 통치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맛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증상은 언제나 불평과 불만입니다. 이미도 허락된 세계를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허비하는 삶이 아닌 오직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그 세계를 더욱더 맛보시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어서 범사에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드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죄와 선행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하늘의 개념은 어떻게 다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문제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소속의 문제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세상에서 그 영광을 드러내는 두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4.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한 세상에서의 생각과 성경의 말씀은 어떻게 다릅니까?

5.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은혜로 여기는 자와 삯으로 여기는 자의 생각의 차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6.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과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은혜가 왕 노릇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은 노아가 방주를 만든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9. 오늘 말씀에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보이시는 은혜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내용입니까?

10. 은혜가 왕 노릇하는 최종적인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11.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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