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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삶

본문 / 6: 1- 2

 

 

 

1. 복습

지금까지 로마서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이이나 간에 자기 행함에서는 도무지 선이 나올 수 없는 죄 아래 태어난 존재인가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9-18)고 말씀합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태어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 스스로는 탈출이 불가능하며 또 인간 스스로는 어떤 의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의나 율법을 지켜서 만들어 내었다는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배척하였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죄의 실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니 사람들은 또다시 믿는다는 것을 자기 행위로 대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믿는데 너는 왜 믿지 못하느냐는 식으로 나온다면 이것은 또다시 믿음을 자기 행함으로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성경을 보고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고 만복의 근원이시기에 성경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 복을 받고 사는데 당신은 왜 복을 받지 못하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하면서 결국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또다시 자기 행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기에 자기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받은 복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인데, 이 의롭다 함을 어떻게 받았는가 하는 것을 로마서 4장에 보면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1-8)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오늘날 믿는 모든 자들이 받는 복인데 그것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며, 일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불의가 사함을 받고 그 죄를 가림을 받고 주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할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방식, 즉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으로 구원하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그 행위와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왕 노릇 아래에서 태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담아래 태어났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에서 스스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는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따라 그 많은 자비와 긍휼과 용서로 죄와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를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에 보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셔서 은혜와 생명의 왕 노릇하는 곳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들여 놓으셨다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인간들은 반발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것에 대하여 더욱 더 반발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더 많이 지어야 되겠네. 그래야 은혜가 더욱 넘치지 않겠는가? 은혜를 넘치게 하기 위해 죄를 더욱 많이 짓자 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로 되는 것이라면 내 노력은 아무 소용없고,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다면 내가 아무리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여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결국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는 내가 아무리 엉망으로 살아도 예정되어 있는 자라면 반드시 구원하실 것인데 내가 무엇 하려고 이렇게 하는가, 하며 그냥 놀자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복음을 제대로 증거 된 것이 됩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란 완벽한 것입니다. 얼마나 완벽하였으면 그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사도가 이미 예상하였고 또 실제로 이런 말들이 있었기에 오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오해와 변론

우리가 함께 나누는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씀을 1장에서부터 계속합니다. 그러다 6장과 7장을 보면 사람이 믿고 나서 무슨 성화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라는 말씀이 또다시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살든지 육신을 따라 살든지 결정하면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6장이 갑자기 나오게 된 것은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서 그러면 내 마음대로 죄나 짓고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반응이 나오기에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세계가 어느 정도로 엄청난지 로마서 8장까지 가야 결론이 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9-30)고 합니다. 미리 아신 자들을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신 것을 누가 송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예수 믿는다고 교회 나온 교인들도 갈등이 되고, 목사도 갈등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갈등은 자기 행함이 부인되어져야 하니 무언가 확실하게 붙들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도 정성도 기도도 헌금도 예배참석도 그 어떤 행위도 부인되어져야 하는 것이 복음의 선포입니다. 그런 반면에 목사의 갈등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계속하여 오직 은혜, 오직 믿음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헌금도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행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의 행함을 조금이라도 강조한다면 절대로 나오지 아니할 반발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기도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전도도 하지 말라는 것이고, 헌금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러면 은혜를 넘치게 하려고 죄를 마음대로 지어야 되겠네요, 하는 반발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긍정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곳에서는 그것이 복음이라고 아무리 말하여도 로마서에서 나오는 이러한 반발은 나오지 않습니다.

 

 

3. 죄에 대하여 죽은 자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절부터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라고 합니다. 복음을 들으면 정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영화롭게까지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은 그러면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하면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는데 설교가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하게 되면 사람들이 교회나 선교나 구제에는 관심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도, 전도도, 헌금도 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돈을 쓸 바에야 교회에 내서 예배당도 짓고, 전도도 하고, 구제도 하는 것이 낫지 너무 그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걱정과 염려가 조금이라도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 할수록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하게 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은혜만 증거 하여야겠다는 것이 더욱 절실하게 인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으니 그러면 죄를 더 지으면 은혜가 더욱 넘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인데 바울사도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 수 없는 것입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안에서는 유혹과 욕심이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계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경쟁심도 있고, 수군수군합니다. 현실적으로 죄라는 것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하여 죽었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을 오해하여 가장 잘못된 내용 중의 하나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 완전주의자의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에 이제부터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말에서 하나님의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죄 없이 살아갈 특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리처럼 해야만 제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단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단체들과 교파들이 자기들만이 완전하다고 말합니까? 우리 교회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날마다 해체되고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날그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지 나의 체험이나 전통을 근거로 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살아있는 가지이듯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어야만 지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주의자들은 한번 예수 믿는 것으로 더 이상 예수님의 구원도 은혜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살아갈 가능성을 주었기에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점점 죄를 적게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믿으면 믿을수록 또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큰 죄보다 더욱 더 크고 놀라운 큰 용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책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는 하지만 죄의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보다 더한 세계입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로 옮겨졌기에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전에는 죄의 권세아래 있어서 그 곳에서 아무리 선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아도 죄의 권세로 사망의 열매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 들어 왔기에 이제는 죄의 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왕이 부실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영역이 바로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세계란 선악체계 속에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세계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모든 인간에서 동일하게 들어있는 사고방식이요 가치관이요 세력입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절대로 전적인 대속을 믿을 수가 없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죄가 왕 노릇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혹시 필요하다고 하여도 자기의 노력에 조금씩 보태어주는 정도로 필요한 것이지 나의 행한 것을 모두 다 걷어치우고 주님 홀로 일하신 것으로 채우려는 것에 대하여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선악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죄 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모습이 선악체계에서 살던 버릇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늘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던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지도 못하고 예배도 드리지 못하면 죄스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음껏 못하고 찬송도 마음껏 못하니 답답하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스스로 죄라고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라면 내가 무언가 열심히 잘하고 있으면 늘 든든해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믿는다고 여기는 생각이 선악체계의 버릇이고 습관인 것이고, 반대로 이런 마음이 죄임을 아는 자들이 바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챙겨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자기의 의를 주장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나 행한 것 죄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내가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을 얻고 영화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그 아들의 피로 대속하여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여 놓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스스로 탈출 불가능하듯이 의와 생명의 왕 노릇은 죄와 사망의 왕 보다 더 크고 온전하고 완전하기에 더더욱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은혜를 그 사랑을 죽을 때 까지 알아갈 것입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고 온전한지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방식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전 CF에 부부가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 남편이 침대에서 뛰어 올랐다 내려오면 옆의 아내가 붕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때로는 붕 떴다 침대 밑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방 안에 있고, 집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뭘 해도 하나님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안에 있는 것이며,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1)고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이며,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은혜임을 알아 오직 주안에서 더욱 더 아름답고 놀라운 그 은혜를 알아 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의와 하나님이 주신 의는 어떤 다른 증상으로 나타납니까?

2. 인간들이 생각하는 믿음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3. 나님께서 오직 은혜의 방식으로만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복음을 제대로 들었을 때 들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어떤 것이라 합니까?

5. 하나님의 복음을 접한 성도들과 목사들의 갈들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6.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하는 내용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죄가 왕 노릇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라고 말씀합니까?

8.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란 어떤 자들이라고 말씀합니까?

9. 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에 산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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