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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

본문 / 20:11-16

 

 

1. 마리아의 울음

오늘 본문 앞의 말씀을 보면 안식 후 첫날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아 놓은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처럼 땅을 파서 매장하는 방법이 아니라 굴의 입구를 돌로 막은 것이 무덤이었기에 그런 무덤의 돌이 치워졌다면 그것은 무덤이 열린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무덤이 외부인의 침입을 받았음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고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있었던 마리의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마리아는 제자들이 돌아가자 울면서 무덤을 들여다봅니다. 마리아가 우는 이유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시신이 없다는 것이 결코 울 일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게 시신이 사라진 일은 시신을 도둑맞은 경우가 되겠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부활하셔서 시신이 없는 것이기에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은 곧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것인데 마리아가 울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전혀 생각지를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다시 사실 것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울면서 무덤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인해 운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깊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의 감정과 느낌에 국한 된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예수 자체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지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죽은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 즉 예수에 대한 감정이며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으면서도 예수를 사랑한다고 떠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자신의 느낌일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남기신 진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생각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런 신앙과 이런 사랑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상관없이 내가 예수님을 생각해 줌으로써 자신은 예수를 믿는 자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를 두고 사랑 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현실에서 마리아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낙심하고 슬퍼하고 염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을 믿자는 말을 하기 전에 과연 믿음이 또 신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비록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우는 모습이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이나 또 사랑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완전 무지에서 보여지는 비신앙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신자는 피로써 맺어진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가 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이 감사함으로 남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단지 주님을 생각해 주는 것으로 사랑한다고 또는 믿는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마리아의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과 신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당시 무덤 안의 광경입니다. 마리아가 무덤을 들여다봤을 때 무덤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20:13)고 물어 봅니다. 이것은 마리아에게 우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울 필요가 없는데 울고 있는 마리아를 책망하고 깨닫게 하기 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울 필요가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다시 생존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에 처한 우리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천사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는 모습은 구약의 속죄소를 생각하게 합니다. 속죄소란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덮은 뚜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 하여 시은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떼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와서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에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소의 뚜껑 양 끝에는 두 그룹, 즉 천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덤에 천사 둘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의 양 끝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무덤의 광경은 구약의 속죄소의 모습을 그대로 실현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덤의 광경은 죄인으로서 죽어야 할 자들이 어린양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죄를 용서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도 부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만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부활은 생각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예수라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도 마리아의 수준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내 알바 아니고 나는 다만 예수님이 내 일을 잘 도와서 주셔서 잘되게만 해주면 된다는 식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서 예수님이 없다는 것 때문에 웁니다. 자기 인생이 자기의 뜻대로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낙심하는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시신이 있다는 것은 죽음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고, 시신이 없는 것은 죽음의 세계를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세계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나라이기에 죽음조차도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 가지를 못하는 곳이 바로 생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신자가 바로 이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리를 염려로 끌어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바로 이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든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울음도 절망도 없습니다. 다만 기쁨이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20:15)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은 마리아에게나 오늘 마리아와 같은 신앙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마리아를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다니는 그 상태로 그냥 두었다면 나중에라도 시체가 없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을 것입니다. 설령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구원과 상관이 없는 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으셨다는 것은 희망이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리아를 고아처럼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이 붙드시고 책임지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 역시 마리아의 수준에서 울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울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각자의 삶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우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면 울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고 나를 책임지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운다는 것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란 내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는다면 자신의 상황이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에서는 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울음이 멈추지 않는 삶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울면서 예수님을 찾고 도와 달라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일을 겪든 무관심하게 있다가 도와 달라고 외치면 그때서야 도와주는 분이 아닙니다. 또는 도와줄 준비를 하고 계시다가 간청을 하면 비로소 달려와서 도와주는 그런 예수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하고 또 어떤 반응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기 위해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로 인해 주어지는 영생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이나 형편에서의 도우심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연약한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를 붙들어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역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도우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우리의 신앙은 어느 한 순간도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지탱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탐욕과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으로 가득 찬 우리의 악한 심령으로 어떻게 믿음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의 능력이고 도우심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서든 염려할 것도 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마리아의 울음이 더 이상 울음으로 지속되지 않도록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울음을 기쁨으로 바꾸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열심

부활을 알고 있는 우리들 시각에서 마리아를 보면 분명 마리아의 신앙은 엉터리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오라비인 나사로가 살아가는 것을 목격을 했으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한 마리아는 분명 신앙이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리아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리아도 예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아는 백성으로 고쳐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해서 그런 마리아와 다를 것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고치심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극히 삼가야 하는 것은 믿음에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치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엉터리 같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붙드시고 인도하실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사망이 다스리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우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이 시간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집 세고 완악한 우리에게도 찾아오심으로써 주님을 알고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음을 생각함으로써 믿음에 절대로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랑할 만한 신앙도 없음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43장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고 말씀합니다. 믿음에 연약한 모습만 보여주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든든함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를 정죄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는 이 말씀 앞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체 모두가 함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고치시고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연약한 믿음을 도우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시며 그런 우리의 하루하루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아름답고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누리며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말씀에 마리아가 울고 있는 이유와 마리아가 울 이유가 없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울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3. 우리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천사가 하나는 주의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서 잇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합니까?

5.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울고 있는 마리아와 같다는 것과 그와는 달리 우리가 사는 생명의 나라는 어떤 나라라고 말씀합니까?

6. 울고 있는 마리아를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 왔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이 된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주님의 도우심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그 도우심을 느끼고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믿음이 없어 울고 있는 마리아를 우리가 함부로 판단치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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