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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의 종과 의의 종

본문 / 6:15-18

 

 

1. 두 종류의 사람

우리는 지난 몇 시간에 걸쳐 이 세상의 사람은 두 종류뿐이라는 것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한 종류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 사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한 종류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의 사람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본인의 의사와 행위와 상관없이 죄의 종입니다. 반대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역시 자신의 의사와 행위와 상관없이 의의 종입니다. 아마도 복음을 들으면서 가장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이 부분을 증거하고 또 그 복음에 대한 오해와 반발에 대하여서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는 14절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법아래 있다는 것은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인이 되는 것이고 또 그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체제가 법아래 있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당장 그러면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런 반발에 대하여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이미 로마서 5장에서 보았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0-21)고 합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 결과가 사망으로 가지만 반대로 은혜가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항상 그 결과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고 복음에 대하여 반발하는 자들의 반응이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욱 지어야겠구나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 들어서며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6:1-2)고 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인데 어떻게 죄를 짓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연약과 부족으로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을 몸을 가지고 있어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어 가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몸의 사욕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신 것처럼 이제 성도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주장하고 관리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에 대해서도 반발하는 것이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말씀 15절에도 보면 앞에 있는 1절의 말씀과 비슷하게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6:15)고 이야기 하며 오늘 본문인 16절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6:16)고 합니다. 16절은 왜 그럴 수 없는지를 일반적인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느냐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라면 죄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기에 죄가 시키는 대로 하여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게 의를 행하라고 한다고 해서 의를 행할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의의 종은 의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의가 인격으로 드러납니다. 다르게 말하면 마귀의 종은 마귀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종은 예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 아래 있는 의의 종된 자들이 죄를 짓자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으로 사망이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고 합니다. 죄가 사망이면 순종은 생명이라고 해야 하는데 바로 생명이라고 하지 않고 의에 이른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순종으로 생명에 이른다고 하면 지금까지 믿음으로, 즉 은혜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말에 모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종도 우리의 행위가 되어 그 대가로 생명을 얻은 것이 되어 은혜가 아닌 인과율의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의 대가로 생명이 아니라 순종으로 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의에 이른다는 것은 의로운 삶에 들어간 것입니다. 즉 의의 왕 노릇하는 곳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들어간 것이 우리의 순종인가 하는 것은 다시 17절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2. 종과 의지

17절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오늘 본문에 보면 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종은 자신의 권리나 주권이 전혀 없는 노예라고 보면 됩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기에 죽이고 살리는 모든 권한이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 의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망과 생명을 두고서 인간이 스스로 사망과 생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인문학자이며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는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결합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루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루터가 노예의지를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짐을 지고 가는 짐승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위에 누가 타고 가는가에 그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를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밝히 계시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30장에 보면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을 지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생사화복이 네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복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가 처절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생명과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화와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들에게 생사화복 중 택하라고 하면 인간은 언제나 생명과 복이 아닌 사망과 저주를 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죄의 종이었음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야 참 자유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종이 된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를 주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을 인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귀신들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보고서 당신의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면 그 사람은 당장 우리를 향해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는 자신이 죄의 종임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자유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알아서 조절하고 선택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참으로 고상하고 인간의 인격과 이성의 능력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인간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할 수 없는 죄의 노예라면 어떻게 의의 종이 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8:34-36)고 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의 구체성이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은 영원히 집에 거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고 합니다. 결국 아들이 자유를 주시는 방법뿐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5-40)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믿고 사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이제는 그런 자신이 주의 은혜로 의의 종이 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순종으로 의의 종이 되는 이것을 로마서 617절에서 한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6:17)라고 합니다. 시작이 감사한다고 합니다. 죄의 종이 순종으로 의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하여 바로 터져 나오는 내용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소식이었으면 다른 그 무슨 이야기보다 감사가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만약에 죄의 종이 의의 종이 되는 일에 인간의 순종이나 애씀이나 노력이 있었다면 이러한 감사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의 종이었다가 의의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요 감사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전하여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훈의 본이란 복음의 내용 전부를 말하는 것으로서 믿는 도리입니다. 이것을 전하여 받고서는 그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또다시 내가 순종하여 된 것처럼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표현은 바울이 로마서 10장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표현이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순종을 동일 선상에서 설명함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에 보면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8-19)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18절에서는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표현하지만 19절에서는 믿지 아니하므로라고 표현함을 볼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42절과 6절도 참조).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표현은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믿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복음의 내용을 알게 하고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고후5:14-15 참조). 그래서 같은 본문을 공동번역 본으로 보면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6:17 / 공동번역)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분명하게 복종하게 되었으니라고 하여 수동태로 드러납니다.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종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복종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열심에 항복하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3. 오직 은혜로

어느 인간도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전도가 소용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전도란 참으로 미련한 것입니다. 전도라는 말은 선포라는 말입니다 설교는 남녀노소 신분의 지위고하와 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교육학적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미련한 짓입니다. 오늘날의 교육학은 인간의 발달심리학에 따라 아주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연령에 맞추어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볼 때 복음의 선포가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미련한 선포의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거나 물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것은 주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물주는 사람은 필요시마다 사용되어지는 도구일 뿐이고,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성부의 계획과 성자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되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능력이요 성도의 감사와 찬양의 제목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입들이 막아지고 또 자기 자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직 믿는 자들의 동일한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고백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백들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고 가볍게 죄를 다루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싫어하며, 믿는 사람들 또한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서 빠져 나왔는지 그 죄의 깊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죄보다 더한 은혜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7-18)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교훈의 본 본은 결코 흔들리면 안 됩니다. 본이 있어야 그 본대로 모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지옥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다시 죄를 짓자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제는 의의 종, 의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아시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환경과 조건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일들 가운데서도 오직 진리 위에서 또 복음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시고 허락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거하는 두 종류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라고 말씀합니까?

2. 사람이 법아래 있다는 것과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3. 죄의 종이 사망이면 순종은 생명이라 해야 함에도 바로 생명이라고 하지 않고 의에 이른 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어떠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까?

5. 인간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할 수 없는 죄의 종이라면 어떻게 의의 종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까?

6. 우리가 전하여 받은바 교훈의 본을 마음에 순종하였(믿었)다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전도가 미련한 것이라는 의미와 또 그와 같이 일하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8. 복음 앞에서 드러나는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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