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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율법의 기능과 역할

본문 / 7: 7-13

 

 

1. 율법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혹 이런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서는 지키지 못하였다고 죄인이다, 하시지 말고 처음부터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죄인으로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왜 선악과를 두셔서 따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따 먹지 못하도록 아예 만드시지를 말든지 아니면 따 먹을 마음도 안 생기도록 하시면 죄를 짓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3절에 보시면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7:13)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주시고 계명을 주신 것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하신 것이며, 죄가 심히 죄 되게 하시기 위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의 금지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금령을 통하여서도 무엇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이겠습니까? 바로 죄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러면 죄라는 것이 아담 이전에 있었다는 것이고 또 그 죄의 배후가 바로 사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그를 처단하시기 위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 도구로 율법과 계명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율법은 오히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확정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한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게 됨으로 죄가 주관치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 바울이 성도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러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그렇다면 은혜가 더 하도록 죄를 마구 지어야 되겠네.’ 라는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반발들을 바울 사도는 예상을 하면서 로마서 6장과 7장에서 율법의 기능과 한계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속하여 섬기는 것으로는 결코 의로울 수가 없고 사망을 위한 열매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백퍼센트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단 하나의 죄라도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스스로 율법을 지켜 벗어날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영의 새로운 것을 섬기게 된 것은 죄와 사망의 세력보다 더 크신 분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여 내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출 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자신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어서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율법을 주시고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지키지도 못한 법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지킬 능력도 없기에 주지 않았고, 자기들은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큼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었고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인 바울이었습니다.

 

 

2. 율법을 깨닫기 전과 후

오늘 본문을 보면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7:9)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을 말합니다. 물론 그때도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기에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몰랐을 때에는 자기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았다는 것은 죄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다 지켰으니 죄가 죽었고 자기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다 처리하였다고 그래서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자기는 죽고 죄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명이 이르렀다는 것은 계명의 문자적인 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과 정신까지 알게 되니, 다시 말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게 되니 자신이 죽었고 죄가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을 몰랐을 때에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나서 그 율법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고 그렇게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얼마나 죄에게 속았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7:11)고 말씀합니다. 죄가 계명을 기회로 삼아 바울을 속여서 자신을 죽였다고 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스스로 속고 있었던 때가 도리어 율법 외에 나타난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대하여서, 복음에 대하여서는 속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결국 자기 속에 탐심은 어찌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7절부터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7:7-8)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이 아니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탐심이 자기에게 있는지 알지 못하였을 것인데,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니 죄가 탐내지 말라는 그 계명을 가지고 오히려 기회를 잡아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 내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고 합니다. 죄가 문에 엎으려 있다는 것은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즉 본문의 말씀대로 죄가 기회를 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의기양양하게 나서며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그런 행동이 없기에 스스로 너 보다는 내가 낫다고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너 왜 그렇게 했느냐?’고 큰소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기회를 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나무란 것이 잘못이 아니라, 나는 너보다는 착하다는 생각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 적으로만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수시로 나타나는 죄 된 모습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옆에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을 보내심으로서 말미암아 이런 우리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에 대해서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의가 없음을 발견하고 의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다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20:17)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들어오니 오히려 탐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죄 되게 하시는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자기가 살아있을 때에는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켜 온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것도 남의 집에 소유를 훔쳐오지 않으면 되는 줄로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탐심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18:18-23)고 말씀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관원은 바울만큼 율법에 있어서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영생에 대하여 질문을 한 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자기 자신을 평소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여겼기에 새로운 선생이 나타났다고 하니 자기의 의를 테스트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정도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소유를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완벽한 선을 행한 것이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겠습니까?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곧 온전한 선이고 영생을 얻는 실천이라면 그러한 실천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많지는 않지만 소유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유를 모두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소유가 있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소유가 제자의 길이라거나 영생과 구원의 근거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고 말씀합니다. 여기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은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소유를 나눠주는 구제나 자기 몸을 희생하며 타인을 돕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영생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영생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끄심으로 가능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지 우리의 선함과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 선한 실천을 하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천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근거로 구원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부자 관리는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의 문제로 답하십니다. 그것은 소유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소유가 곧 생존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고, 소유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상승되고 하락되기도 합니다. 소유가 없는 사람은 온갖 설움을 겪기도 합니다.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무시를 받을 때도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로 살아가는 환상에 빠져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소유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상에서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말씀하기 위해 소유를 모두 나눠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부자인고로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는 못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탐심인 것입니다.

 

 

3. 오직 은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말씀인데 골로새서 말씀에 의하면 탐심이 곧 우상숭배”(3:5)이기에 문자적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물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우상숭배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은 부족함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할 것 뿐 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8:9-14)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이 말씀에서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왔는데 처음부터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다른 인간들과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십일조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바리새인과는 다르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전에는 부자 관원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서 흠이 없다고 하였을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따라다니는 그 이단들은 마땅히 제거하여야 한다는 자기 의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바로 그런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무엇인지를 계시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죄를 더욱 죄 되도록 드러내시면서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죄의 배후세력까지 다 처리하실 것입니다. 죄와 사망을 멸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왜 구원이 전적인 은혜로만 되는가를 역시 율법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그 방식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율법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된다고 합니다. 율법에 의하여 처절하게 정죄 당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감사한 자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항상 말씀 앞에 나를 세워 우리의 실체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며 그 모습 그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하고 아름다운 자로 세워 가시는 그 은혜와 사랑 앞에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릴 수 있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죄가 기회를 타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탐심과 예수님을 만난 후의 탐심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7. 오늘 말씀에서 탐심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8. 오늘 말씀 끝에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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