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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원함은 있으나 행하는 능력은 없노라

본문 / 7:14-21

 

 

1. 하나님의 선

인간은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인간의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본다고 해서 아무나 참 하나님과 인간의 실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아야 참 하나님과 인간의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17)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에 글자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읽으며 그 성경을 통하여 참으로 하나님이 계획과 목적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고 또 그런 인간 스스로는 어떤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처절하게 인식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7:18)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선을 안다고 하고 또 그 아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선이라고 여기는 그 선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에 인간들이 선을 행한다는 것도 당연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히브리인들을 통하여 처절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아서 자기들은 다 지킨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행한 그 행동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갔던 모습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선과 악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선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면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셔서 심판을 행하시고, 지옥에 보내셔도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악의 결정은 하나님만이 하시는데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아는 일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게 되었지만 그렇게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며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보시기에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알고, 악을 안다고 하여도 그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스스로는 악을 자제하고 선을 신장시키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어떻게 증거 하고 있는가를 함께 보고자 합니다.

 

 

2. 인간의 실상

먼저 창세기 4장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4:3-8)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자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드리는 제물에 대하여 그 제물을 받으시거나 또는 받지 않으시고 하는 것은 그 제사를 받으시는 분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하여 인간이 왜 나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느냐?’는 것이 선을 행지 아니하는 모습이라는 것이고 또 그러한 인간의 생각이 죄가 문에 엎드리는 것이라고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지만 가인은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문에 도사리며 가인을 지배하려고 하는데 그 죄의 지배를 가인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십니다. 그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의롭게 됩니다. 그러나 죄의 세력이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각양 탐심을 일으켜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7:13)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죄인 됨을 예레미야 13장에 보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율법이 아닌 새 언약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가 새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악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악한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 얼마나 교묘한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대항하게도 하고, 전혀 관심 없게 만들기도 하고, 율법을 다 지켰으니 나는 의롭다는 착각에 빠지게도 만드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율법에 열심이 특별하였는지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5-6)고 말씀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바울이 그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예수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고 또 예수 믿는 자를 죽였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는 사람의 결론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죄 아래 팔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4-17)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신령한데 우리가 죄 아래 팔렸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려 있는 상태에서 율법이 투입되니 그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 인줄 알고 열심히 지켰는데 그렇게 행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율법을 다 외울 정도로 엄격한 바리새파이며 그 중에서도 열심인 바울사도가 무식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지하였다는 말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선한 일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도리어 선한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한 꼴이 된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18절부터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7:18-19)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은 선한 것을 알아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을 안다고 해서 선이 아니라 선을 행할 능력이 있어야 선한 것입니다. 선을 알아도 선을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율법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언제 알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바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을 알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이 있다고 하여도 그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함은 있으나 행함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선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인 도리어 선이 아니라 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4장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4:17)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선이 무엇인지를 앞뒤 말씀을 살펴보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앞부분인 13절부터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4:13-16)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너희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합니다. 그런 인간의 삶이기에 우리는 주께서 허락해 주시면 우리가 살아가며 이것저것을 해보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지금 너희들은 헛된 자랑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랑이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자랑하여 살고 있습니까? 자기 인생의 계획과 꿈과 포부를 이야기 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람과 자랑을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장사하여 이익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하면서 나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생각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인줄 모르고 세상의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신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임을 알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선인데 바로 이것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뒷부분인 5장에 보면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5:1-6)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말세에 재물을 쌓은 것이 저주라고 합니다.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고,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이 저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이러한 내용은 다 알고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렇게 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알고는 있지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 앞에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자기는 행함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한다는 자부심은 자신의 행함을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성경의 말씀과 비교하시고, 예수님과 비교를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행함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알고 입을 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율법의 기능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19-20)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모든 입을 막아 심판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로마서 11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2)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긍휼을 받은 것입니다.

 

 

3. 믿음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인 기준에서의 선을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는데 바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입니다. 이들의 믿음의 결단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백세에 낳은 아들이삭을 번제로 불살라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선한 것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습니까? 또 라합은 기생입니다. 몸을 파는 기생이 무슨 선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정탐꾼을 숨겨준 것입니다. 자기의 조국을 배신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을 행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의 선하다 악하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 앞에서도 우리가 하는 일을 악이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와 악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죄와 악함의 처절함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늘 자기 잘난 맛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에 모였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에 대하여 얼마나 실망을 하셨습니까? 자기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처절하게 좌절하였습니까? 원함은 있지만 행할 능력이 없는 모습을 절감하십니까? 시편 65편에 보면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65:3)고 말씀합니다. 죄악이 나보다 힘이 셉니다. 그래서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그 허물을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며 또 복이며 또 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오히려 죄의 법이 나를 끌어오는 곤고한 모습을 보게 됩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탄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더 이상 자기의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함에도 별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하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도 나를 보게 하며 또 나를 살게 합니다. 그러니 이 복음 안에서, 주 안에서 이미도 허락된 이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께서 율법을 받은 히브리인들을 통해 철저하게 밝히고자 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2.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과 악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 가인에서 드러난 죄는 무엇이며 또 그 죄에 대한 인간의 실력은 어느 정도라고 합니까?

4. 새 언약은 무엇을 전제로 선포되어지는 것이며 또 죄의 교묘함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5. 죄 아래 팔린 자들에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모습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6. 인간에게 선한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언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7. 고보서의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에서 드러난 율법의 기능 중의 하나는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무엇이 복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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