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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탄식과 그 가운데 나오는 감사

본문 / 7:21-25

 

1. 탄식의 시기

오늘 본문에 있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7:24) 라는 이 탄식이 중생한 자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중생하지 못한 자에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어느 시기의 문제인가 하는 것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을 때의 일인가 아니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의 일인가 또 신앙의 초보일 때의 문제인가 아니면 성숙하고 나서의 문제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선 로마서 6 장과 7 장을 로마서 전체에서 볼 때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가를 바르게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 로마서 1 장부터 5 장까지는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증거 한 것입니다 .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구원의 능력이란 오직 복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 하면서 인간의 죄를 동시에 말하였습니다 . 그래서 로마서 5 장에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 5:19-21) 고 말씀합니다 . 여기서 말씀하는 영생과 구원의 길이란 인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인 되어 버리고 또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의인이 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 결국 누구에게 속한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 율법으로 말미암아 범죄를 더하게 하여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죄와 율법도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 반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죄를 더 많이 지어도 되겠구나 , 하는 반발에 대하여 로마서 6 장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6:2) 하는 것이 로마서 6 장의 내용이라면 , 로마서 7 장은 율법의 기능과 한계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율법에 죄가 틈을 타서는 오히려 각양 탐심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계명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율법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율법을 다 지켰기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 마치 부자 관원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것처럼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사람입니다 . 성전에서 자기는 의롭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보여지는 예수 믿는다는 제자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잡아 죽이기 위하여 달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 이때의 바울사도의 의에 대한 관점은 율법을 지키느냐 또는 아니냐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는 그 당당한 자부심과 그 율법을 허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추호도 용서하지 아니하겠다는 충성심으로 달려가던 그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 사도행전 9 장을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 9:1-9) 고 말씀합니다 . 여기 예수님을 만난 사울의 모습이 눈 먼 자처럼 드러나는 것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기에 자신이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달려가던 그 모습이 주 앞에서는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그렇게 율법에 대하여 밝히 알고 흠이 없던 자가 율법이 증거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이자 땅에 엎드려지고 눈이 멀어져 버린 것입니다 . 3 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간 것입니다 . 지금까지 예수를 이단의 괴수라고 여기고 그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달려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의 빛을 받고나자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 율법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사도들에게서도 동일한 관점이었습니다 . 그것은 율법이나 절기나 성전이나 제사나 무엇이거나 간에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하신다는 요한복음 5 39 절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람이 의문에 속한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자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곤고하고 탄식이 나오는 것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 이러한 탄식은 중생하여야만 나오는 것입니다 . 그 전에는 탄식이 아니라 율법 지킴에 대한 자랑과 당당한 자부심이었습니다 .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이제 한 법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

 

2. 탄식과 감사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7:21-24) 고 말씀합니다 .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인데 그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기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율법의 선한 뜻을 이루고자 하는 원함이 있으나 그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합니다 .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탄식이 중생 이전입니까 ? 아니면 이후입니까 ? 이후입니다 . 왜냐하면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선을 행하며 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런 자신의 생각 자체가 악이고 죄라는 것을 깨듣게 된 것입니다 . 그 율법의 바른 뜻을 모를 때에는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그 삶에서 죄가 오히려 율법을 지킨다는 그것을 이용하여 바울을 속이고 죄를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 자기 의를 만들어 하나님의 의를 철저히 대적하며 살게 한 것입니다 .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중생하지 아니한 자들도 이러한 탄식이 있지 아니한가 ,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죄를 이야기 하고 , 죄의 값으로 죽는다는 말을 합니다 . 유명한 한 스님도 자기 죄로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죄 개념이 아니라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개념의 죄인 것입니다 . 그러한 죄란 결국 자기완성을 위한 기준인 것입니다 . 그 기준을 설정하여 죄다 , 아니다 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가지는 선악의 결정자체를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 이런 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이고 ,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탄식이라도 어떤 탄식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 자기가 마음의 법으로는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그런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죄의 법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 바로 사망의 몸 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 몸은 죽을 몸입니다 . 이 죽을 몸이 생명에게 완전히 삼키게 되는 그 부활의 순간에 이러한 탄식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서는 이러한 탄식이 없었는데 , 주의 영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지킴의 한계와 종교의 한계를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신의 탄식에만 머무르고만 있지 않습니다 . 25 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7:25) 고 말씀합니다 . 이 감사가 탄식 중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고 , 갈등을 하고 있고 , 탄식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 물론 전에도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의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 자기는 죄인들과 달리 의롭기에 자신의 의로움을 인하여 감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러한 자랑들이 다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기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 지금 자신이 탄식하고 있는 모습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이 사망의 몸에서 자신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건지실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탄식에서 갑자가 분위기가 감사로 바뀌는 것에 대하여는 시편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 시편에서 탄원을 하다가 갑자기 찬송을 하는데 왜 갑자기 찬송이 나오는지 시편 안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 그래서 신학자들이 연구해보고서 몇 가지를 제시를 한 것이 있습니다 . 탄식에서 갑자기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구원의 신탁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 또는 자신의 탄식이 실제적으로 해결이 되어서 감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 우리도 근심하고 탄식하는 일들로 말미암아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 그런데 말씀 중에 또는 찬송이나 기도 중에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 그러면 근심과 탄식의 문제들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 죽도록 고민한 문제가 말씀 한 구절로 인하여 봄눈 녹듯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 이러한 경우에 어찌 감사하고 찬양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로마서 7 장은 율법의 기능과 그 한계를 깨닫고 나니 그 안에서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탄식은 탄식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 이것은 처음 믿을 때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면 갈수록 더욱더 세밀하여지고 난이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 그래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그 깊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단지 처음에 주님을 만났을 때만의 탄식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몸에서 건지실 주님을 더욱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

 

3. 은혜로만

그래서 고린도후서 5 장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 고후 5:1-5) 고 말씀합니다 . 우리의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까지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 그 보증을 성령을 주셨기에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로마서 8 장에도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 8:22-23) 고 말씀합니다 . 믿는 우리에게는 아직 몸의 구속이 남아 있습니다 . 그러므로 몸이 있는 한 우리 안에서 갈등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입니다 . 우리의 육신이 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 로마서 8 3 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8:3-4) 고 말씀합니다 .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찬양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 이런 우리를 위해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하십니다 . 로마서 8 26 절부터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8:26-30) 고 말씀합니다 . 우리는 연약하고 , 우리는 넘어지고 , 우리는 실수하여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주 예수의 날에 우리를 그 창세전의 계획대로 완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 이 소망 위에 우리가 서 있고 또 이 소망으로 사는 자는 결코 망할 수 없음을 알기에 오늘도 주님이 허락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바울이 로마서 11 장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11:33-36) 이라고 고백합니다 .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 지기를 소망하며 또 그 고백 위에 굳게 서서 주만 바라며 살아가는 주 바라기 인생이 되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말씀 복습하기 )

1. 영생과 구원의 문제는 무엇이며 , 그 가운데 율법의 용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

2.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의에 대한 관점은 무엇입니까 ?

3.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나 후의 모습과 시각이 어떻게 달라진다고 합니까 ?

4. ‘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는 탄식이 중생이후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

5. 사망의 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

6. 지금 우리가 탄식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그 탄식이 끝나는 때는 언제라고 합니까 ?

7.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감사의 내용과 만난 후의 감사의 내용은 어떻게 다릅니까 ?

8. 우리가 깊은 탄식을 하는 이유와 그 탄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쳐 나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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