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2,456
오늘 : 252
어제 : 238

페이지뷰

전체 : 78,748,445
오늘 : 1,664
어제 : 1,564

제목 /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언하는 양자의 영

본문 / 8:15-17

 

 

1. 성령의 인도

성경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물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그들라는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조건에 더 이상 관심을 두거나 다른 것을 첨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인도함 받는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신비한 경험 쪽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영이고, 그 영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분명 뭔가 신비한 방법으로 인도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음성을 들었다느니, 환상을 봤다느니, 꿈에 뭘 봤다느니 또는 성경을 읽다가 뭔가 마음에 끌리는 구절이 있으면 그 구절이 바로 성령이 나를 인도하는 구절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성령이 인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한 이야기들은 성령의 인도를 자기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령의 인도를 자기 주관적으로 멋대로 해석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모른 채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모습들이 난무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육신을 부인하게 하고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신 보혜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가 육신을 죽이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모두 거짓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의 진로를 위해 기도할 때 성공적인 진로를 알려 주는 것이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 자식의 진로에 매어 있는 부모의 욕망을 책망하고 자식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인도를 강제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죄짓는 쪽으로 가고 싶은데 성령이 강제적으로 내 몸을 죄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끌고 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하신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내가 아무렇게나 해도 성령이 책임지겠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사고자체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오심으로서 무엇이 죄악된 것이고,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게 하셔서 죄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된 인간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인생에 최고로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자연히 육신을 죽이고 세상에 미련 두지 아니하고 최고의 가치 있는 분을 스스로 좇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좇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가게 되고 자연히 그 속에서 사랑과 봉사와 섬김과 헌신을 추구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비록 자신에게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모습으로 여기게 됨으로 자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이러한 인도로 살아가는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기 구원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구원을 확인하여 의심 없고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의도라는 것은 알지만, 인간이 자기 구원을 확인하는 쪽으로 눈을 돌리면 필히 자기 행위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는 자기 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내 육신을 부인하는 모습이 있는가?’를 확인하려고 할 것이고, 그런 흔적이 보여 질 때 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구나라는 안도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구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육신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결과이지 우리 행위의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곧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다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토대로 그런 행동을 스스로 함으로써 자신이 구원 받았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기뻐하는 사람이지 자기 구원의 확신으로 기뻐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것도 역시 성령의 인도함이 아니라 자기 욕망으로 사는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습니다. 이미 아들과 아버지는 부자지간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관계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신자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이루진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에게서 아들의 자격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 관계를 증거하고 보증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되고 두려움 없이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없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지옥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이런 두려움은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한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어떤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핑계 삼아서 아들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낳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십니다. 때로는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자녀가 아니라면 이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2:8)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은 신자는 징계까지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묵인하시고 넘어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또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다 들어주신다는 것으로도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남자나 여자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이해심이 많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잘했고, 잘못하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이해하고 넘어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에 아들이라는 것도 아들이니까 나를 도와주시겠지라는 차원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자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아들이지, 아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일 처리를 해주는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벗어날 때는 언제든지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버지를 부르되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아들답게 살게 해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르는 자신을 치면서 아버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양자의 영으로 인도 받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3. 자녀 된 증거

그런 자들에 대해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8:16)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신자는 성령이 있는 자이고, 성령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인도함 받는 것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한다는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신자를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세우시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일 하신다 하면 그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너무 무사 안일함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도 우리가 하다가 할 수 없는 것을 맡겨야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 맡깁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뭔가 그럴듯한 논리로 들려질 수 있지만, 사실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해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1-22)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약속을 하셨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너희는 믿지 못 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은행에서 돈을 대출 받을 때 돈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내세우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을 믿지 못하겠으니 당신이 안 될 때 당신의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시켜보고 안 될 때 성령으로 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세기부터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한마디로 인간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지 할 수 있다. 시켜만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가 없기에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우리의 실패입니다. 그 실패를 보여주심으로서 결국 성령을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 우리의 힘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굳게 붙드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고 그 구원이 차츰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이미 구원받은 자이지만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패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이 오셨다는 것으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약속을 실패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으로 더불어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놓고 성령을 믿고 실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에 대해서는 실패한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핑계 삼아 자신의 실패를 즐긴다든지 또는 실패에 대해서 안심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성령님이 함께 한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우리를 성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함께 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필히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증거라는 것을 체험과 경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방언을 한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이상한 꿈을 꾼다든지 하는 자기 체험을 통해 성령의 증거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을 체험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체험이 없다고 해서 성령의 증거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성령의 증거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무슨 체험을 하던 또 하지 않던 결국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는 말씀으로 성령의 증거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자녀란 곧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라고 해서 하늘의 것을 누리는 영광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는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상속자이시기에 그분과 함께 한 상속자라면 그분이 가신 길이 곧 오늘날 우리들이 가는 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고난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실 때 그 증거물은 고난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체험을 증거로 여기면 결국 모든 신자에게서 성령의 증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받지 못한 신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4절에서는 성령이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함께 하는 성령님은 같은 분이시라는 뜻이고 그렇기에 성령님의 증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져야하는 증거이기에 자기 체험을 성령의 증거로 내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의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힘을 보태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령 받았다는 것은 연약한 신자에게 힘을 부여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렸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삶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예수님을 이끄신 성령님이 오늘 동일하게 우리를 이끄신다면 결국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으로 이끌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이 증거 하실 때 그 증거는 신자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채우는 삶, 즉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채운다는 것을, 예수님이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하는 외형적인 것을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가 우리 속에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원리가 곧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신자의 삶의 차이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차이가 아니라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증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은 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고생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도 고난 받자라고 하게 됩니다. 고난을 착한 일을 하는 고생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 고생을 내보이면서 사랑했다고 하고, 희생했다고 하면서 잘난 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로 채우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는 삶이기에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기에 육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삶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령의 인도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2. 원이란 무엇이며 또 구원받은 자의 모습에 대한 우리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3.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성령의 오심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4. 양자의 영으로 인도 받는 아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라고 합니까?

5. ‘성령께서 하신다고 하는 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6.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슨 뜻이라고 합니까?

7. 성령이 함께 하는 자의 실패가 결코 실패가 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모든 하나님의 상속자에게 나타나는 증거물이 똑같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9. 하나님의 상속자가 받는 고난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5 2022 7월 17일 / (롬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관리자 2022.07.17 286
574 2023 7월 16일 / 요한복음 10. (요 2:1-12)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 관리자 2023.07.16 9
573 2023 7월 16일 / 요한계시록 20 (계 6:1-2) 첫째 인 관리자 2023.07.16 8
572 7월 16일 / (마6:10)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관리자 2017.07.15 140
571 7월 15일 2부 / 은혜의 연보로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23 관리자 2012.07.15 1674
570 7월 15일 / 마가복음 11. (막 2:1-5) 그들의 믿음과 죄사함 관리자 2018.07.14 93
569 7월 14일 / 마가복음 60. (막 10:35-40)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 관리자 2019.07.13 115
568 7월 13일 / 사도행전27. (행7:1-16) 아브라함과 할례 그리고 두 아들 10 관리자 2014.07.13 999
567 7월 12일 / 사도행전76. (행25:13-22) 성도들의 삶의 우선순위 관리자 2015.07.11 488
566 7월 12일 / 갈라디아서 12. (갈 3:23-29)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 관리자 2020.07.12 211
565 7월 11일 / 히브리서 36. (히 10:1-4) 좋은 일의 그림자 관리자 2021.07.10 92
564 7월 10일 2부 / 영광의 자리에 초대를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 관리자 2010.07.11 1405
563 7월 10일 2부 /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위하여 2 관리자 2011.07.09 1806
» 7월 10일 / 로마서 44. (롬8:15-17)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언하는 양자의 영 관리자 2016.07.16 311
561 2022 7월 10일 / (고전 13:1-3)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관리자 2022.07.10 300
560 7월 23일 / (마 6:11)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들 관리자 2017.07.22 120
559 6월 9일 / 마가복음 55. (막 10:13-16) 하나님 나라와 어린 아이 관리자 2019.06.07 89
558 6월 8일 / 사도행전22. (행5:12-16)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표적과 기사 8 관리자 2014.06.08 1248
557 6월 7일 / 사도행전71. (행22:2-21)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의 체험 관리자 2015.06.06 577
556 6월 7일 / 갈라디아서 7. (갈 2:17-21) 믿음 안에서 사는 것 관리자 2020.06.07 210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