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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보지 못하는 것을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본문 / 8:18-25

 

 

 

1. 인생의 어리석음

사람들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기 위해 꽃놀이를 한다고 합니다. 여름에는 계곡과 바다로 여름휴가를 떠나고, 가을이면 단풍놀이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겨울인 사람은 봄이 오는 것도 싫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것도 다 싫은 것입니다.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낙엽 많이 떨어져 싫은 겁니다. 그저 자신의 얼어붙은 마음처럼 날씨도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계절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원함과 상관없이 변함없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뜻과 포부들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마음 속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마음 중심에는 고난은 피하고 영광은 취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짜증이나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도대체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 중심이란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부정하고 자기중심으로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90편에 보면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90:1-11)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이 허무한데 그 허무한 인생의 일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인 까닭은 바로 주님의 진노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주를 두려워하며 주의 진노를 알겠습니까? 또 이러한 주님의 진노가 어디에 쏟아지는 것입니까? 그것을 인생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해 주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를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고난을 하느냐는 항변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항의조차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며 또한 자기 의가 그 안에 가득하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였는데 왜 이렇게 고난이 심한 것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정말 만사가 형통합니다. 그런데 그 만사형통까지도 자기중심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나에게 불편하고 고난스러운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지리라는 것을 만사형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만사형통은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셉이 감옥에 가는 것을 형통하였다고 말씀하고도 있지만 그것도 요셉이 지금은 고생하나 나중에 애굽에 총리가 되기에 형통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에 형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위해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며 또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안다면 오늘날 그분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영을 받아 예수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분을 우리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모습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애의 자취와 흔적이 나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세상의 질서와 체제에 합류하라는 유혹, 즉 돈을 위해 존재하는 메시아,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 메시아, 자기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존재하는 메시아로 세상 속에 존재하라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면서 공생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물리치신 이러한 것을 구하고 있다면 출발도 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마귀의 유혹에 속고 있다고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 기다림

그래서 오늘도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기다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열매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열매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라고 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기다림도 수시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신을 심어 주면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밋밋한 가운데서 오직 인내하라는 그 말씀만이 우리를 붙들 뿐인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를 참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도 기다린다는 것은 싫어하실 것입니다. 약속 시간을 정해 놓고 기다린다면 몰라도 갈 테니까 기다려라는 말 한마디로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진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리는 동안 지루한 시간을 무엇으로 메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 그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서 하다못해 성냥 쌓기라도 하고 또 그냥 길에서 기다릴 때는 아카시아 가지라도 하나 꺾어서 하나하나 그 잎을 떼어 내며 더 기다린다, 그냥 간다를 외치며 그 지루함을 달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냥 기다리지 못하고 기다리는 동안 뭘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하고 있는 종교 생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라고 하니까 기다리는 동안 뭘 할까요?’를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잘 했다 칭찬하시겠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간다. 기다려라고만 하셨을 뿐이지 내가 가는 동안 이것을 하고 있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있다면 증인되리라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네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다만 내 올 날을 기다리고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뭘 하라고 했으면 차라리 덜 힘들 텐데 하라는 것 없이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니까 기다리는 시간을 무엇으로 때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고, 많은 상을 받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장차 올 영광을 기다리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장차 올 영광을 기다린다는 것은 세상을 나그네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갈 곳을 바라보고 가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라면 현재 내가 발붙이고 있는 그 땅을 자신이 거할 땅으로는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기다리는 자와 기다리지 않는 자로 구분됩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말하면서도 그 재림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세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와 약속을 해놓고 그 사람을 기다리면서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버린 채 그 즐거움에 파묻혀서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고 하여 장차 나타날 영광을 말합니다. 신자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21절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8:21)고 말씀하면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23절에서도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23)고 말씀하면서 신자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로 표현합니다. 기다림은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피조물들이 어떤 감각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한평생을 영광의 날만 기다리며 살 수 있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노아를 보면 그는 500세가 된 후에 홍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간이 일 이 년이 아닙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에 홍수가 났으니까 자그마치 100년 가까이 방주를 만들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세월을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기다림의 삶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기다리는 동안 하고 있는 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기다려도 좋지만 그 일에 빠져서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심판 받을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살아도 괜찮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세상에서 하고 있는 일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는 자인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빠졌다는 증거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세상 것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영광의 날을 기다리는 자로서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기다리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21절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8:21)고 말합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온 우주까지도 그 저주에서 벗어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이미 포기한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희망 두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세상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세상은 탄식과 괴로움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현장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탄식과 괴로움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세상 말고는 달리 피난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피난처를 찾습니다. 남자들은 찌 들린 직장 생활 속에서 가정을 피난처로 여기기도 하지만, 가정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 다른 것을 통해서 피난처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술집을 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난처를 찾고자 하나 피난처가 없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며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디를 가도 탄식이 기다리고 괴로움이 기다립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온전한 피난처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세상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을 벗어남

이런 세상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 속에서 쉼터가 되어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세상에 의한 탄식과 괴로움을 없애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서 예수께로 나오는 것이 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린다는 것에는 세상을 떠난다. 세상을 벗어난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단지 장소적인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함께 살아가는 공간적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욕망, 즉 소유와 명예와 권력의 욕망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를 향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향한 욕망은 끝없는 가치향상을 추구하는데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면 인간이 끝없이 추구하는 가치 향상이 곧 가장 커다란 세속적 욕망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육신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탄식과 괴로움을 통해서 더욱 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희망을 세상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장차 나타날 영광에 두고, 몸의 구속에 두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세상에서의 탄식과 한숨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잠시 기다리고 있는 장소인 세상에 모든 삶의 목적을 둬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고 천국은 보너스 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는 천국이 전부이고 세상의 삶은 잠시 머무르는 장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향해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4-25)고 합니다. 신자의 소망이라는 것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이 유혹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인내하고 참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기다리는 분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내 앞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성냥 쌓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냥 쌓기가 즐거움을 줍니다. 즉 기다리는 동안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내가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직접 하고 있는 성냥 쌓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냥 쌓기라는 놀이에 빠지게 되어 내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좀 더 높이 쌓고 멋있게 쌓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기다리는 분은 때가 되면 오시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이라는 날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세상이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은 저주 아래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은 장차 주어질 영광, 몸의 구속입니다. 이 날을 기다리며 사는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나그네입니까? 이 물음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점검하여 기다리는 자로서의 삶과 본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짜증과 원망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2.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짜증과 원망을 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라고 말씀합니까?

3. 리가 원하는 형통과 하나님의 형통은 무엇이며 또 하나님의 형통의 신약적 표현은 무엇입니까?

4. 오늘 말씀에 종교 생활을 무슨 비유로 말씀하며 또 그런 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믿는 자들이 주의 말씀처럼 기다린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합니까?

6. 우리가 주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동안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인내하며 기다리는 우리들이 세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까?

8. 세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말씀합니까?

9.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착각의 현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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