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1,613
오늘 : 75
어제 : 256

페이지뷰

전체 : 78,743,420
오늘 : 401
어제 : 1,28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

본문 / 8:34-39

 

 

1. 우리의 연약함

예전에 어느 목사님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6·25때 북한이 쳐들어 왔다가 다시 밀려올라가는 상황에서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들을 계속해서 북으로 끌고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결국 그들을 죽이고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리고 그 명령을 한 장교에게 하달하여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받은 북한군 장교가 그들을 한 곳에 몰아 놓고는 지금이라도 예수 믿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살려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지고자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장교는 부인하는 무리와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두 무리로 나누었는데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무리를 나눈 후에 그 북한군 장교가 상부의 명령대로 죽인 자들은 놀랍게도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이 아닌 살겠다고 예수를 부인 자들을 살해하였다는 내영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진 내용은 그 북한군 장교의 어머니가 사실은 권사님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두 사람이 돌아 왔을 때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은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살아남은 배교자라 여겼고, 도리어 죽은 자들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순교자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그런 의혹과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그 이야기의 진실을 털어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북한군 장교가 국군에 의해 붙들린 다음에야 그 사건의 실상이 알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소설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지금 성도들 앞에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똑같은 위협에 직면하였을 때 과연 부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환난이 닥치고, 곤고한 일을 만나고, 말할 수 없는 박해가 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렇지 아니한데 오히려 예수를 믿는데도 기근이 옵니다.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오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배신하지 아니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우리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항상 이렇게 나는 부족하지만 주께서 힘을 주시면 부인하지 아니하고 순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는 답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이 정말 믿음이 좋아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작고 사소한 이익 앞에서도 안색이 달라지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결단과 결심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연약한지를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실상

인간의 이러나 연약함에 대해 성경도 많이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 사도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라고 말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하는 고백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베드로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26:35)고 하여 모든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이 말은 얼마든지 진심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삼년간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보았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며 전도를 하였고 심지어 베드로는 물위를 걷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의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34)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잡히시고 고난을 받는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세 번이나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한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면 그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치실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자신의 고백처럼 실행하기 위해 칼을 빼들고 휘두르다가 말고의 귀를 베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칼도 거두라고 하시면서 순순히 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리고 그렇게 잡혀 가시면서도 아무런 기적도 능력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힘없이 죽음으로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는 그 수많은 군중들의 추궁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던 결단과 결심이 하루도 가지 않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우리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환난과 곤고와 박해 그리고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닥치는 것입니다. 마치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는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데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시간도 바치고, 목숨 같은 돈도 바치고, 정성을 바치는데 나를 도와주시기는커녕 오히려 환난과 박해와 적신과 기근이 계속 닥쳐도 주님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이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오기가 강한 사람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지 아니 주시는지 두고 보자는 식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를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축복할 때까지 매달리겠다는 오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우리 생각처럼의 복을 주실 때까지 매달리라는 내용이 아니라 야곱의 뜻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즉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야곱에게 남기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을 기억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든가 또는 우리가 주님을 붙든다든가 하는 것은 언제나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우리의 결심과 결단 그리고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것도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항상 상황에 따라 쉽게 바뀝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에게 죄의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삯인 사망의 종이었기에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할 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나타내시어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언제 나타난 것입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8-11)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연약함이나 부족이나 실수로 인하여 취소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믿음이 없을 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시기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분과 대화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학습을 받았는데 세례를 오랫동안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문답의 내용 중에 교인의 의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다 지킬 자신이 없어서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솔직한 대답입니다. 아마 우리도 세례문답을 하였다면 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중에 지상교회의 성도의 교회생활의 주제에 대한 몇 가지 문답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는데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질문은 교인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모든 물질은 주께 받는 것이므로 주의 사업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라는 것이 답입니다. 교인은 어떻게 경제적으로 협조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세례 받을 자의 답은 교회의 모든 경비와 사업비에 성심껏 협조해야 합니다라고 답해야 합니다. 헌금의 표준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십일조와 감사를 표준으로 몸과 마음과 모든 물질을 바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는 것이 답입니다. 그리고 교인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첫째는 모든 집회 출석의 의무가 있고, 둘째는 교회 발전에 힘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의무가 있으며, 셋째는 거룩한 사업을 위한 경제협력의 의무가 있고, 넷째로는 성경을 힘써 배워 실천할 의무와 마지막으로는 진리를 보수하고 교회 헌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답입니다. 이렇게 답을 해야만 그 다음에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답 가운데 무엇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모든 집회 출석의 의무란 공적인 집회 전부를 말합니다. 주일, 수요일, 금요기도회까지입니다. 지금 이 규정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례문답에서 이런 질문을 하니 자신은 그 질문에 답을 할 자신이 없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답니다. 우리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겠다고 다짐과 결심을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마음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획하신 일은 바꾸어지거나 취소하거나 실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하면서 질문을 하니 나 자신은 믿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믿지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대답을 한 분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란 인간의 조건을 따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침저녁으로 너무나 쉽게 변합니까? 흔히 말하는 것처럼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우리이며 또 변덕이 죽 끓듯이 하는 자들이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신뢰와 사랑으로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겠습니까? 이미 베드로가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주님의 사도로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까?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22:31-3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기에 비록 세 번이나 부인을 하였을 지라도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믿음 안에서의 우리의 실상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누가 대적하겠으며, 누가 송사하겠으며 또 누가 정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5-39)고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결코 끊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종일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을 지라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로 인하여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확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만든 확신이 아니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확신은 흔들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포기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만든 확신이면 흔들리다 무너질 수 있겠지만 변함없으신 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우리의 연약함으로 흔들릴 수 는 있어도 결코 무너지지는 않는 곳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베드로의 고백과 다른 바울의 확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가운데 있는 은혜며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사도 또한 천사나 권세 자들이나 그리고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우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범사에 주께 영광이 되는 복된 삶이시기를 기도하며 또 그 아름다운 은혜와 사랑의 능력으로 매일이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존귀한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주로 하는 말은 무엇이며 또 그 말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2. 우리의 다짐과 고백과 결심이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3. 성경은 누가 누구를 사랑한 것이라 말하며 그 구체적인 증거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4. 우리들의 연약함과 실수 그리고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구원이나 사랑이 취소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다시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성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거나 끊어지지 아니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베드로의 확신과 바울 사도의 확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53 8월 26일 1부 / 무너뜨림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11 관리자 2012.08.25 1446
652 8월 26일 / 마가복음 17. (막3:7-1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관리자 2018.08.26 204
651 8월 24일 / 사도행전32. (행8:9-25) 마술사 시몬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관리자 2014.08.22 1148
650 8월 23일 / 로마서 1. (롬1:1-4) 복음으로 살아나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 관리자 2015.08.22 547
649 8월 23일 / 갈라디아서 18. (갈 5:7-12) 십자가의 걸림돌 관리자 2020.08.23 139
648 8월 22일 2부 / 자녀 되고 지체된 우리에게 요구된 신앙 관리자 2010.08.21 1337
647 8월 22일 / 히브리서 42. (히 10:32-35)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 관리자 2021.08.21 96
646 8월 21일 2부 /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7 관리자 2011.08.20 2505
» 8월 21일 / 로마서 49. (롬8:34-39)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 관리자 2016.08.20 145
644 2022 8월 21일 / (요4:19-24) 영과 진리의 예배 관리자 2022.08.21 357
643 2023 8월 20일 / 요한복음 14. (요 3:16-21) 하나님의 사 관리자 2023.08.20 17
642 2023 8월 20일 / 요한계시록 25. (요 6:12-17) 여섯째 관리자 2023.08.20 9
641 8월 20일 / (마 6:9-13)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 아멘 관리자 2017.08.19 98
640 8월 1일 /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관리자 2010.07.27 1546
639 8월 19일 2부 / 육신에 속하지 않은 우리들의 무기 13 관리자 2012.08.18 1689
638 8월 19일 / 마가복음 16. (막 3:1-6)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관리자 2018.08.18 436
637 8월 18일 / 마가복음 65. (막 11:15-19)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관리자 2019.08.17 124
636 8월 16일 / 사도행전81. (행28:23-31) 오직 주의 말씀대로, 오직 은혜로 관리자 2015.08.15 538
635 8월 16일 / 사도행전31. (행8:1-8) 큰 핍박 그리고 큰 기쁨 관리자 2014.08.22 511
634 8월 16일 / 갈라디아서 17. (갈 5:1-6)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관리자 2020.08.16 16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