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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에게는 없는 낯선 사랑

본문 / 8:35-39

 

 

 

1. 낯선 사랑

우리나라 동화 가운데 큰 가시고기 이야기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 큰 가시고기는 해마다 초봄이 되면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 일부 강 하구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강을 거슬러 올라와 물의 흐름이 잔잔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알을 낳습니다. 그 중에서 수컷은 알들이 부화 하여 자랄 때까지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새끼들만 돌보다가 그 알이 부화하면 남은 자기 몸까지도 부화한 새끼들의 먹이 감으로 제공하는 생을 마감하는 물고기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희생으로 자란 큰 가시고기는 또다시 자기를 키운 부모처럼 자신의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물고기만도 못하게 삽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또 자식이 부모를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식에 의해 버림받은 부모는 경찰에 의해 보호소에 수용되면 자기 집 주소도 모르고 자식 이름도 모른다고 한답니다. 자식의 이름이 알려지면 자식이 부끄러울까봐 그런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의 가슴이 뭉클하면서 부모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주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또 세상에서도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영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도덕적인 사랑은 육적인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 친구의 사랑, 인류애는 모두 육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사랑을 말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은 육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너무 낯설기에 사람들이 감당을 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의 가족이란 요셉과 마리아와 그의 자녀들 이었습니다. 성경에 요셉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셉은 빨리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장남인 예수님이 30세가 되었다면 그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보고 어머니를 봉양하여야 할 텐데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마리아가 찾아왔을 때 사람들이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말하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3:33)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5)고 하였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로운 가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아주 낯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5-27)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부모 아내 자식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과연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대부분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확대하면 부모, 처자식,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고자 따르는 것도 결국 자기 사랑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미워하며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낯선 말씀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님만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사랑할만한 분인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사랑할 만한 분이 못됩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방금 누가복음 한 곳의 말씀만 보아도 당장 돌을 들고 달려들지언정 환영할 수 없는 말만 하시는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척과 사회까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미워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따른다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도를 한다거나 설교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서비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어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었기에 싫어버린 바 된 그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와 같은 운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선물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들이기에 이러한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기에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보고자 합니다.

 

 

2. 사랑의 내용

구약성경 말라기서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1:2-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랑이란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그 언약적 사랑의 결과로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으나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상황은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곤고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무엇을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하면서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항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환난이나 박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 임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 것입니까?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러는 것입니까?’ 하는 항의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는 항변이 나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9:13)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에 누가 더 고생을 합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야곱이 훨씬 더 고생을 합니다. 에서는 세상의 야망을 이루어 가고 또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에서는 그냥 그렇게 하나님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셨기에 그 성취마저도 종국에는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랑하셨기에 야곱의 야망을 꺾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나그네 세월을 험악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마지막 하나 붙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 로마서 9장에 보면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0-13)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다는 이것이 우리에게는 낯선 사랑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가 확정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이란 일방적인 택하심이요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하심이기에 그러한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입니다. 이런 사랑을 세상의 무슨 법으로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랑이 낯설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해할만 한 조건적인 사랑을 이야기 하게 되면 윤리와 도덕이 되는 것이고, 율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육적인 사랑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교회로 모여 사랑을 이야기 하고 또 무슨 활동을 한다고 하여도 결국 육적인 사랑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뜻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로 세워지는 교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의 뜻으로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야말로 전적인 긍휼로만 되어지는 것을 알고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위력인지를 세상의 환난 가운데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환난 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 것을 보게 됨으로 환난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곤고나 박해 속에서도,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이런 어려움들은 왜 주는 것입니까?’ 하면서 따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어려움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몰라도 좋으니 이런 어려움이나 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결국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똑같이 사랑을 말해도 다 같은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에 있는 바울의 기도를 보면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4-19)고 기도합니다.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을 그리고 그 사랑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사도가 확신되어진 바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 같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다가 종일 도살당할 양처럼 여김을 받다가 힘없이 말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망이 그를 붙들어 둘 수가 없었기에 그 사망마저 이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또 그 안에 있는 무수한 일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구원받는 자를 돕는 것인데 어떻게 감히 천사들이 끊고자 하는 일을 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즉 마귀도 끊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자도, 현재 일이나 장래일도, 어떠한 능력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큰 사랑

시편 2편에 보면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2:1)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꾸미는 헛된 일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2:2-3)라는 내용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기를 거부하는 세상은 여호와와 그리고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대적하며 그 권세에 복종하지 않고 자유하고자 합니다. 즉 열방의 분노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주관하고 붙드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왕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기를 즐기는 세상에게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과 주관자가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들의 일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헛된 일을 꾸미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2:4)고 하십니다. 주께 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들이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는 비웃을 수밖에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과 열심과 실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이뤄보겠다고 설치는 모습들이야말로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보시기에 우스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뜻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2:6-9)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왕권을 가지고 세상에 세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아들에게 유업으로 주셨고, 그 나라는 땅 끝까지 이름으로써 세상 모든 나라가 아들의 권세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아들을 거절하고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처럼 깨뜨려 버리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2:12)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아들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다스릴 분이시기에 누구든지 그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 하시다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장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한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뭘 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허락하신 그 사랑을 누리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 사랑이 나를 살게 하고, 이 사랑이 나로 하여금 움직이게 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그 완전하신 주의 사랑에 매여 주의 스스로 종 된 자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2. 성경(예수님)이 말씀하는 사랑이 우리들에게 낯선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설교와 전도는 무엇을 전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선물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주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다릅니까?

5.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나님께서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통해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시편 2편에서 열왕이 분노하는 이유와 또 그들이 벌이는 헛된 일은 무엇입니까?

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내용물은 무엇이며 또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최고의 사랑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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