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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울의 큰 근심과 신자의 복

본문 / 9: 1- 5

 

 

 

1. 바울의 큰 고통

성령이 충만하였던 바울사도가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9:1)라고 합니다. 자기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 하는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의 가장 큰 근심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부터 8장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였습니다. 바울을 통해 주신 복음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받은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지난 2주간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끊을 수 없으며 죽음조차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견인이라고 하는 것은 굳게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성도가 굳게 참고 견뎌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의 백성을 끝까지 굳게 하시고 견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요 변함없으신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부터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9:4-5)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엄청난 혜택을 입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내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함께 나눌 로마서 9장부터 11장의 말씀들은 단지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높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데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로마서 1장에서부터 8장까지의 복음의 진리를 상고하면서 중간 중간에 복음을 오해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을 전하면 그러면 죄를 더욱 지어서 은혜를 넘치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니 그러면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꺾어지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거룩하심과 영광에 훼손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처럼 계시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 의해 편협함이라는 탄핵을 받을 수 없는 절대 자유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행하신 모든 일은 그 어떤 결정이라도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언약의 성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성취임을 오늘 본문 6절 이하에서 남은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바울 사도의 큰 근심이란 바로 자기 동족이 구원에 이르기를 강렬하게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바라는 바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과연 끊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바울사도가 가장 큰 고통이요, 저주라고 생각하는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동족들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신자의 고통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때 하신 최후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기도는 우리의 생각처럼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십자가를 피하기를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십자가를 지시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버림받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이 없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하면서 부르짖으시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다 성취하신 것이며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승천 하셔서 그 대속의 은혜를 입을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 얻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이며 영원한 저주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적으로는 비관론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에 세상 적으로는 비관론적인 사람인 것은 맞지만 하나님 나라의 측면에서는 낙관론 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낙관론 적이라는 말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낙관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윤리나 도덕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발생하는 공해문제, 에너지문제, 경제문제가 해결되는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살자고 하는 투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착취 계급으로부터 노동자 농민을 구원하자고 하는 노동 운동도 또 무슨 민주화 운동도 아닙니다. 믿는 자들은 오직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아무리 공해 문제나 경제 문제가 해결되고 또 노동자 농민이 다 공평하게 사는 세상을 이룬다 할지라도 결국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과 멸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 해 주어야 할 교회에서 조자 계속하여 세상에 미련을 두게 만들며 세상을 추구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로 살아가도록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교회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인간의 가능성에 미련을 두고 있다면 교회로 모여서도 서로 떠날 준비를 하자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우리 교회를 만들까를 걱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가장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로이드 존스목사는 기독교란 모든 구분과 차이를 없이하고 누구나 다 예의 바르고 행복하고 기분 좋은 동료의식이나 형제애나 우정을 가지게 하여 서로 간에 다 경우 바르고 모든 일이 다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방종하며 어리고 거짓된 개념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0장의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10:34-35)라는 말씀을 증거 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이 세상에서의 탈출을 도모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날마다 역적모의를 하는 자들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보이는 것들로 유혹을 합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겠노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세상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가리고 있기에 보이는 세상만 추구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장차 이 세상이 불에 타서 멸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이 말씀을 증거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아직도 사람의 도덕성에 가능성을 두고서 세상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이런 설교를 듣는다면 아마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 자신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늘 터져 나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사는 것에 대한 고통에 대해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 내 마음이 편한 것을 구원 받은 것이라고 또는 자유 한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저주와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단지 비유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두 종류로 나누어 질 것입니다. 한 사람은 고통 받는 음부에, 한 사람은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이 호의호식 하면서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과 비록 거지로 살았을 지라도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살았던 나사로의 삶 중에 어느 것이 복 있는 삶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바울사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특권들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인 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한 그 모든 율법적인 행위로 인해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그렇게 약속한 메시아였음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기에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성경이 새롭게 보이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한 참된 메시아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안타까움과 근심과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바라는 바라다고 하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3. 신자의 복

이러한 바울의 심정을 구약에서는 모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0-32)라고 합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를 알기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었던 이러한 마음이 신약의 바울에게서도 동일한 고통과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보다 더 한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5-39)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위로요 복이요 힘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모세나 바울과 같은 이러한 고통이 과연 있기는 한 것입니까? 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으니 내가 구원받았으면 되었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라면 역시 이기적인 개인구원론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개인 구원이라면 혼자 예수 믿고 교회로 모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듣고 구원과 심판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우리의 주위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이 드는 것입니까? 세상에 부족할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고서 부러워하십니까? 아니면 바울과 같이 근심하십니까? 우리의 큰 근심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나 친척이나 주위의 사람들에 대하여 무엇에 대하여 큰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이나 안일 속에 있지 마시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묵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주님을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르게 아는 자들이며 또 그 은혜를 증거하고 자랑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삶속에서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믿는다고 자부하는 자들이나 또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말씀에서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바울이 말하는 큰 근심은 무엇이며, 어느 정도로 그 근심에 대한 애절함이 있습니까?

3.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의 기도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4. 신앙에 대한 오해가 만든 것은 무엇이며 또 진정으로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참 복음이 선포되면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믿는 자에 대한 마귀의 유혹은 무엇이며,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 자들은 어떤 자라고 합니까?

7. 사도 바울의 동족을 향한 안타까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8.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안일함은 무엇이며 또 은혜를 바르게 아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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