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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본문 /  롬 9:24-26

 

1. 두 종류의 사람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성경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고 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과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입니다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문제로 삼는 것은사람들의 선악의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냐 아니면 긍휼의 그릇이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된다는 것입니다이러한 하나님의 결정과 일하심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구원이 그런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라면 선하게 살아서 선택 받고 구원 받기 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인간이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애버리는 결과가 되는데 그렇게 부조리한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를 합니다이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하면 그것은 믿기 이전의 이야기일 뿐이고 이제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설교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그렇게 해서 어떻게 교회가 발전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로마서 자체가 이미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러한 항의를 하든 말든 그러한 항의와 불만에 대하여 한마디로 일축하여 버리는 선포가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20절부터의 말씀이었습니다. 20절부터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9:20-21)고 말씀합니다.똑 같은 한 덩어리의 진흙입니다재료자체가 같은 것입니다그런데 주인의 의도대로 어떤 것은 진노의 그릇으로 또 어떤 것은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분노와 항의가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진노의 그릇이라고 보는 것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러한 일하심과 절대 주권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대우하고 처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반대로 이 말씀에 아멘 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라고 봅니다그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서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지 한다고 하면이는 또다시 자기 구원중심으로 생각한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란 자기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마땅하며 그러한 구원의 조건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하나님까지도 자기의 구원을 위해 힘을 써 주어야만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어주고 대접하여 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그런데 이런 진노의 그릇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흔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합니다그러나 사랑에도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는데 성경의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13장에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고 말씀합니다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여기서 말하는 내용일 것입니다남을 위하여 불사르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자기 자식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결국 그러한 인간의 행위와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별개라는 것입니다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여깁니다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사랑인 육적인 사랑인 것입니다그 육신적인 사랑은 나를 구심점으로 끌어당기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나를 중심에 두고서 무슨 짓을 하여도 그것은 자기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의 사랑은 영적인 사랑으로서 그 사랑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나에게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도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이러한 일하심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 진노를 부으시고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시어 긍휼을 부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대로의 일하심에 대해 우리가 항의와 불만을 가지는 것이 바로 교만이고 죄인 것입니다자신이 피조물이면서도 주인인양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이 드러나는 시점이 바로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인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므로 무엇이 죄인지 확연하게 드러난 것입니다그렇다면 부르심을 입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내가 부름을 입었는가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어떻게 드러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한마디로 나의 부름 받음에는 나는 부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다든지 또는 나는 이렇게 엄청난 큰일을 하게 하기 위해 불렀다든가 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오직 부르시는 분으로만 된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9:24)고 말씀합니다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부르신 자만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에 해당됩니다유대인이라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고,이방인이라고 무조건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초대교회 때만 보아도 유대인보다 이방인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유대인들은 평소에 자신들이 개같이 여기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조상 때부터 섬겨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있으니 이것을 모독으로 여긴 것입니다.바로 이러한 자세가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의 특징인 것입니다반면에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은 자신이 택함을 입을 하등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그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임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풍성함을 증거 할 뿐인 것입니다그래서 사도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 본문에 보면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9:25-26)고 말씀합니다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십니다첫째 아들은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의미로 ‘이스르엘’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름에는 ‘심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둘째는 딸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로루하마’라고 하였고 이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셋째로 아들을 낳았을 때는 ‘로암미’라 하여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죄를 범하므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즉 하나님께 심판당하고 버림받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이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인 것입니다그러나 한 날이 이르면 다시 ‘루하마’와 ‘암미’라고 불러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그리고 하나님의 그 약속은 백성들이 자기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 한 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고 나서야 그렇게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이 말씀을 이제는 이방인에게로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방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이스라엘의 거역으로 잘려나간 자리에 접붙여진 것입니다이를 통하여서 유대인의 자격이나 이방인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일단 자기에게서는 그 어떤 조건도 나오지 못하는 것임을 먼저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그럼 먼저 유대인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보냄 받은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8절부터 보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6:8-10)고 말씀합니다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런 자들의 눈을 감기고 귀를 막아버리라고 합니다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이 스스로 깨달아 주께로 돌아와 고침 받을까 염려 된다는 것입니다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오는 길을 차단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그것은 오직 구원이 주님의 손에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그래야 인간의 영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어떻게 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더 구원시키자고 합니다그런데 하나님은 차단하십니다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사람을 불순종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로마서 11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2)라고 하십니다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고 나온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긍휼을 깨뜨려버리는 일인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으로만 되는 것입니다이 일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우리가 다 판단하고 측량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 긍휼 입은 자의 증상

그렇다면 주의 긍휼의 그릇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은 어떤 인식이 있겠습니까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자신은 전혀 부름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자신들 스스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의 자리에 가야하고긍휼을 입지 못하는 자리에 가야하는 것입니다자신들이 평소에 멸시하였던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의 자리에 있는 자이여야 하는 것입니다결국 이 땅의 누구든지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인식시키시는 것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하시는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5-6)고 하십니다복음이 어디로 증거 됩니까이방인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닙니다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합니다그리고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것입니다여기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에게 가라는 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잃어버린 자라는 것입니다그런데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지만잃어버린바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였지만 반대로 자신들은 결코 잃어버린바 된 자가 아니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9장에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고 말씀합니다그 유명한 삭개오에 대한 내용입니다삭개오는 유대인들에게 따돌림 받는 자였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가셔서 그를 구원하신 것입니다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시고 예수님의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또 누가복음 15장에도 보면“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5:1-2)고 합니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이 무엇입니까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고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예수가 메시아라면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어야지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리는가 하면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긴다고 비난한 것입니다자기들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이들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반응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저주를 퍼부으신 것인데 그 말씀이 ‘화 있을 진저’입니다이 누가복음 15장에는 이어서 세 가지의 비유가 등장합니다양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고열개의 동전 중에 잃어버린 하나를 끝까지 찾으시고두 아들 중에 잃어버린 한 아들을 기다리시는 내용입니다이 비유는 열심히 전도하자는 비유가 아닙니다왜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지를 알게 하시는 내용입니다그러나 이 말씀은 자기들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여기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요,자신들이 잃어버린 자라고 여기는 자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오늘 주의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감사와 찬양과 아멘입니까아니면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불평입니까오늘 말씀 앞에 서서 우리가 어떤 자인가를 또 어떤 은혜를 입었는가를 바르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단 한 사람도 긍휼을 입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어느 누구도 항의할 수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만한 자들은 없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 결과가 오늘 우리들이라면 이 얼마나 깊고 놀라운 주님의 은혜이며 자비이겠습니까만입이 내게 있어도 이러한 주의 은혜와 긍휼을 말하고 찬송하기에 부족한 자들임을 알고 언제나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나님의 뜻대로의 선택인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은 어떠한 증상이 드러난다고 합니까?

2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은 어떻게 구별 된다고 합니까?

3. 우리의 진정한 교만과 겸손은 어떻게 드러난다고 합니까?

4.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그 어떤 자격도 논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이며 또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주의 긍휼의 그릇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인식은 무엇이며 또 그런 인식을 갖게 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가라고 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8. 께서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불평과 원망이 가질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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