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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의 의와 믿음의 말씀

본문 / 10: 5- 8

 

 

1.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20:1)라고 하시며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 이른 아침은 우리 시간으로는 아침 6시경입니다. 포도원에서 일을 하면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포도원에 품꾼들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오전 9시에 나가보니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에게도 포도원에서 일하면 상당하게 주겠다고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와 동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나가 보니 여전히 놀고 서 있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20:6)고 물으니 그들이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20:7)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똑같이 포도원에 일하러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물매 주인이 청지기를 시켜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들에게 품삯을 주기 시작합니다. 맨 나중(오후 5)에 들어 온 사람은 한 시간만 일하였는데도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좀 더 일찍 포도원에 들어와 하루 종일 수고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기다렸는데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똑같이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만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여기 등장하는 아침 일찍 들어와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그들은 주인을 원망하면서 한 시간만 일한 나중에 온 사람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그때 주인이 대답하기를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3-15)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은 그 당시에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온 자들이란 그들에 의해 멸시를 받던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을 다 동등하게 대하자 여기에 화가 난 사람들이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이 사람의 생각은 자기 행함이 다른 사람보다 많다고 여긴 까닭입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양과 가치를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래 일할 곳이 없어서 놀고 서 있던 자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결론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20:16)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께 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가 아니면 자신이 일한 것의 대가로 여기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분명 한 시간 일한 사람은 자신이 받은 하루 일당을 자신이 일한 것의 대가로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자신을 일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신 것에 감사하며 그 일당을 받으며 주인의 은혜에 감사할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의 은혜를 아는 자를 먼저 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자신이 일한 것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적어도 자신은 늦게 들어 온 자들보다는 더 많은 일을 했으니 그들 보다는 더 받아야겠다고 하는 일한 것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나중 된 자라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 온 자나, 맨 나중에 한 시간만 일한 자나 성경은 동일하게 주인이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 올 수 없는 그곳에 들어 왔음에도 오직 자신의 공로와 일한 것의 대가만을 요구하는 그가 바로 얼마나 신앙생활을 했든 간에 나중 된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입니까? 내가 받은 모든 것들이 은혜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열심히 수고하고 일한 것의 대가로 여겨집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의 대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아담의 범죄 이후로 계속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무화과 잎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린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행위로 자기를 가리고자 하는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끄러움()은 자기의 행위로 가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직 주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대가, 즉 우리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오늘 본문에는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의 의란 레위기 18장의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18:5)는 말씀처럼 한마디로 율법을 지켜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산다는 것은 그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켜야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2:10-11)고 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로마서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보아온 것처럼 율법이란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세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율법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의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것이요, 자기 행위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자기 의가 가득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의는 이렇게 말하지 아니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10:6)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의인화시켜 말하는 것으로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 의가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의 생각에는 사람이 하늘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생각이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즉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10:6-8)고 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의 생각에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기에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음을 말씀하는 것이며 결국 그것은 예수께서 신자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의란 말씀이 가까워서 네 입에 네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이 말씀은 신명기 30장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30:11-14)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거나 먼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늘에 올라가서 가지고 오라든가 또는 바다 밖에 건너가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울사도는 말씀대신 그리스도를 대입하고, 바다 건너를 음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늘로 올라가서 또는 바다를 건너가서 말씀을 가져오라고 하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모셔 내리거나 올리거나 또는 바다 건너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그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게 됨으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래서 사람들이 침 뱉고 돌아선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라는 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도 하고 모셔 올리기도 하겠다는 열심입니다. 하늘까지라도 올라가겠고, 음부까지도 내려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고 모셔 올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인간의 의라는 것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려오고 음부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릴 정도의 열심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오늘날로 따진다면 적어도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우리 교회 가운데 모시려면 좀 그럴 듯하게 짓고 꾸며야 하지 않겠는가는 생각으로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는 것입니다. 몇 백억을 들여서 예배당을 짓습니다. 물론 그것이 다 잘못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기쁘신 뜻 안에서 바르게 하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은 너무 눈에 보이는 것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열심은 있되 믿음은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열심이 유대인들에게도 충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성전이란 성령이 임한 성도이기에 건물이 성전이 될 수 없다는 기본적인 말씀과 믿음이 없이도 우리는 그런 열심을 낼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 우리나 그 정도의 열심이라면 과히 하늘의 그리스도까지도 모려 내려올 만한 열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을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그러자 어떤 교회는 아예 교회 건물을 가지지 않기로 교회의 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체 건물을 가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이 얼마가 들어오든지 간에 매달 백만 원씩만 남기고 전액 선교나 구제비로 사용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우리의 그런 모습까지도 그리스도를 음부에서 올리고자 하는 우리의 열심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과 같이 열심도 내지 않는 우리가 도리어 무언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건물을 만들지도 아니하고, 구제나 선교를 그 정도는 하지 않지만 우리는 말씀을 안다고 또는 복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자부심에 대한 내용만 다를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자기 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는 자기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에서는 결국 자기 의에 빠져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날마다 우리 자신이 부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언제나 걸림돌로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고 올리고 할 정도의 열심이거나 아니면 그런 모습을 보고 비판이나 하면서 자신은 잘 믿노라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의 말씀인 것입니다.

 

 

3. 믿음의 말씀

조직신학의 교회론에서 참된 교회의 제일 중요한 표지가 말씀의 참된 전파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님의 교회의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는 것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목적과 소원을 향한 추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소원도 부수어 버리고, 성도들의 소원과 뜻도 다 태우고 부수어 버리는 불이여 몽둥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29-32)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런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자들도 함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부수어지는 시간이며 또 동시에 동일한 그 말씀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의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다 무너지고, 새롭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그런 현장이 믿음의 말씀이 선포되어 지는 곳이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참된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로 오면 그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느낌과 소원과 어긋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생각에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들 가운데 확고히 서 있도록 놔두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파괴하고 뿌리 채 뽑아 버리고 흐트러뜨립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거룩이며, 의이며, 구원임을 알게 하여 그 은혜만 구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 하는 신앙고백임을 알아 오늘도 이 고백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는 어떻게 분별합니까?

2.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에게 나타난 증상 중의 하나는 무엇이며 또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율법의 기능과 그 궁극적인 목표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율법의 의을 말하는 자들의 불신앙을 믿음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5. 사도 바울이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 지금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주 안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자기 의는 무엇입니까?

7. 우리 가운데 선포되는 믿음의 말씀은 무엇이며 또 그 역할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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