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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본문 / 10: 9-15

 

지난주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려오는 것이 아며 또 음부에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율법의 행함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을 지적하는 말씀이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하늘에게 모셔 내리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거나 또는 음부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음부로 내겨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바로 곁에 있고,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말씀인 복음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인 신명기와 선지서인 이사야서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율법은 왜 인간이 자기의 행함으로 의에 이르지 못하는 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율법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새 언약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새 언약은 옛 언약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돌 판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믿음의 말씀’(10:8)이라고 하였습니다.

 

1. 믿음의 내용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의 말씀, 즉 믿음의 내용이 9절부터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고 합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말씀이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하였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이란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주인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정말 주인으로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거저 자기가 관심하고 있는 것만 이루어 달라고 주여! 주여!’라고 부르다면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자기가 주인으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자기의 종으로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슬슬 문지르면 거인이 나타나서 무엇이나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그런 주로 부른다면 말로만 주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주인이고 예수님은 거저 자기의 기도나 듣고 응답이나 해주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시는 예수님 그래서 모두가 싫다고 고개를 흔들며 돌아서버린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원과 예수님의 소원이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 나라와 그 의가 필요하다고 한 적이나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그 나라와 그 의가 아니라 오직 내 나라와 내 의를 구하면서 살았던 자들이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언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어 마땅한 죄인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까? 과연 어느 누가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우리는 마땅히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알고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자기가 죄인인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당에 나오게 되면 주여! 주여!’ 하면서도 결국은 주님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예수 믿고서 세상적인 것을 구하는 그런 유치한 것에 대하여 이미 졸업하였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러나 자기 의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예수를 믿기 전보다 더 나아진 자기의 모습을 또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으니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어느 정도 멋있는 인간이 되었는가를 비교해보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고, 오직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를 치장하고 또 그럴듯한 모습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순전히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부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믿음으로 주를 부른다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인지를 아는 사람들만이 부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가 없기에 부끄러워서 감히 얼굴을 들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0:11)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앞에 있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고 하는 말씀과 연결된 것입니다. 결국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받고 누리는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범죄를 인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 그 제사장이 살아 나오는 것으로 증명 되는 것 같이 우리 주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우리 위해 하늘 지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피를 뿌리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음을 보이시기 위해 다시 사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오늘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3)고 말씀합니다. 이제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구원을 얻는 것은 어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이름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항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행하는 것이라고는 죄 밖에 없음을 아는 자가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 말씀과는 다르게 단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내용으로 말씀하는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금 로마서의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시고서는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것의 차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고, 주일에 놀러가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행함 자체를 구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행함 자체를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별하면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사람에게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 자체만을 기준해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도구로 존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광과 이름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피조물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위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위해 사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불법을 행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도 그 일들을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 일을 통해 선지자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일을 나열하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이며,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가 담긴 행함은 모두가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행함이 제 아무리 거룩하게 보인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게 불법을 행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씀하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8-40)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좇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거대한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인식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을 때에 일어나는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억제하고 의를 만들어내어서 심판을 벗어나보겠다고 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의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이 죄임을 아는 자는 더 이상 자기 이름에 기대를 걸지 못하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이름만 의지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데 이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자기 의로 가득 찬 유대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겠지만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감사한 복음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간 포도원 품꾼이 하루에 12시간을 일하였든지 아니면 한 시간을 일하였든지 차별이 없이 모두 다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업이 무엇인지, 과거의 전과가 어떠하든지, 어디에 살든지, 성격이 어떠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동일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런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요엘서 2장에서 예언된 내용입니다. 요엘서 2장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28-32)고 합니다. 이 요엘서 말씀은 주의 성령이 임한 사건이 말세적인 사건입니다. 요엘서에 말세에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이 심판의 상황과 함께 예언되고 있습니다. 불과 피와 연기기둥이 일게 되는 심판의 상황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종말이란 메시아오심을 종말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종말이 왔고 이것이 말세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제 성령을 보내셔서 추수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이 종말의 사건이며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보내신 이로 말미암아

다시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3-15)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들으려고 하면 전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파하는 사람은 보내심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마도 우리는 최종적으로 듣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믿고 또는 믿지 않고의 결정을 그 사람이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전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하는 이가 잘 전해야지만 들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올라가보면 무엇 때문에 전하고 믿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모습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전혀 볼 수도 또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결국 보내시는 분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원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또 그 복음을 듣고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이 있기에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자기 부인이 되어 지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요 교회입니다. 지금이 종말의 때이며, 심판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의 때에 아직도 주의 이름이 증거 되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구원받을 만한 때요 또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부인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기적인지를 아시고 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렇게 전적으로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오직 주의 이름만이 드러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라면 교회가 어떠한 크기든 또는 교회가 어디에 있든 오직 주의 이름만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알고 깨달아 거룩한 주의 이름만을 부르며 사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믿음의 말씀으로 선포되어 지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 성령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자들과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드러나는 증상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3.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과 은혜와 복은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합니까?

5.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불법을 어떻게 구분하면 안 된다고 합니까?

6.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며 또 그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듣는 과정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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