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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혜로 남은 자 그래서 은혜로 사는 자

본문 / 11: 1- 6

 

 

 

1. 소망 없는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는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 되었는데도 믿지 않는 것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아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전하여져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0:18)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지 못하여 믿지 못하였다는 핑계가 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미 온 세상에 다 증거 된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18-23)고 말씀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인 낮아지신 예수님과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이미 왔습니다. 이미도 왔지만 그 메시아가 너무나 볼품이 없었기에 그래서 자기들의 소원을 충족시켜줄 메시아가 아니라고 여겼기에 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건이 이 정도까지 되면 이스라엘은 이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망 자체를 죽여 버리고 매장하여 버린 상황에서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 버려도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산다고들 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꿈과 희망 또는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는 인간이 불을 훔친 것에 대해 화가 나서 인간을 저주하기 위해 상자를 하나 줍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으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란 뜻입니다. 그 선물을 받은 판도라는 절대 상자를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지만 호기심에 그 상자를 열게 되고 그러자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인간들이 싫다는 것은 다 나오는 것입니다. 놀란 판도라는 상자를 닫았고 맨 밑에 있던 희망만이 상자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인간들은 힘든 일을 많이 겪게 되었지만 희망만은 잃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떠한 재앙 속에서도 희망이 있으면 산다는 것을 묘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장소가 바로 십자가라는 곳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처형장에서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서 따라가 보았으나 결국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절규 속에서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자리가 그 현장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이 완전히 버림받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1:1)고 합니다. 바울사도 자신도 이스라엘인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알아 그를 믿고 추종하던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 줄 알고 힘을 다해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2-17)이라고 합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인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바울은 아주 열심인 사람이기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바울 같은 죄인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는 도구로 적합하였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이 임하셨도다”(딤전1:15)고 하는 이 말씀 앞에 바울이 무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는 이 소식 앞에서 바울이 무어라고 하는 것입니까? 죄인 주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엘리야와 같은 우리의 착각

이처럼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는 그를 죽였는데 그는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다 불순종아래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순종하여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의 긍휼과 자비로 나온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순종과 자기의 능력으로 나온 사람이기에 주님의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일관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에서 은혜로입니다.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것은 사람이 자기 행위로 의로울 수가 없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브라함 이후 모세시대에 주어지는 것은 왜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일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관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11:2-4)라고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남겨진 자를 자기 백성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엘리야를 통하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하는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의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부름을 받을 때부터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활동한 선지자이며 마지막은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린 선지자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는 월급을 받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무려 85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되어 비가 오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엘리야선지자가 자기의 말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저주에 따라 그렇게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이 대단한지 이스라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특심인 엘리야였습니다. 36개월 동안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주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물이 마르자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과 가루 통에 흉년동안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기적과 그 아들을 살리는 기적도 일어난 것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나타나라고 말씀하시자 바알과 아세사를 섬기는 선지자를 다 불러 모아서 갈멜산에서 대결을 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왕상18:20-22)고 합니다.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멋지게 승리를 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선지자들을 다 잡아서 죽여 버립니다. 이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비가 오기를 일곱 번 기도하여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바로의 병거보다 더 빠르게 아합의 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이제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아합의 성도 불살라 버리는지 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19:2)입니다. 한마디로 이세벨이 엘리야를 자신의 신의 이름으로 내일까지 죽이겠다는 것뿐입니다. 이 소식에 더 놀라운 것은 엘리야의 반응입니다. 지금까지 본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의 일이나 또 갈멜산에서의 하나님의 응답은 누가 봐도 하나님이 엘리야와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능력을 체험한 엘리야 정도 되면 이러한 이세벨의 협박에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이세벨과 맞서는 것이 선지자 엘리야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로뎀나무 아래 이르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먹을 것을 주어 기력을 회복하여 호렙산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라고 묻자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3)고 하는 반복된 물음에 대해서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4)고 하여 앞의 10절과 같은 답을 합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답을 보면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쳤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야가 도망을 쳐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할 정도로 낙심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불이 내려와 단을 태웠을 때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18:39)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말한 대로 바알 선지자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백성들은 완전히 하나님을 믿게 되고 엘리야 편에 선 것처럼 보여 집니다. 사실 엘리야도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상태였지만, 불을 내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목격하고,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변화되어서 아합의 악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앙의 개혁을 일으켜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바른 신앙의 길을 갈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자, 엘리야와 함께 하면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닥쳐올 것을 생각하고 엘리야에게 등을 돌려 버리는 백성들에 대해 크게 낙심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러한 형편을 탄식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로뎀 나무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의 탄식과 낙심과 절망은 갈멜산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백성들에게 아무런 열매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며 또 이것이 주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우리의 열심이 가져올 결과를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때 엘리야와 같은 낙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항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낙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기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천사가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주는 것은, 엘리야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산에까지 갈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위대한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일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낙심하고 주저 않은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산에 갈 만한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껏 하나님이 주시는 그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우리의 바른 선택으로 주 앞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은혜를 맛 보고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주를 떠나 사는 게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임을 모르면 엘리야 같은 낙망이 생겨 오직 자신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열심인 듯 여기며, 주 앞에 홀로 남은 듯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은혜로 남겨 둔 자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런 반응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고 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 자기 혼자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인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처럼 믿어야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 자는 자기 혼자뿐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고 하십니다. 이것이 택하심을 따라 남아진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서는 자기의 열심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기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 엄청난 기적과 능력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순간입니다. 입을 닫고서 할 말은 오직 주의 은혜로 남았을 뿐입니다라는 이것이 엘리야의 고백이고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때로는 엘리야 같고 또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 같습니다. 잘 믿는 것 같지만 엉뚱한 짓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잘 믿는 것 같은 그 시간은 우리의 실력으로 그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도 주께서 우리를 붙들어 그렇게 살게 하셨음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은혜로 남겨진 칠천 명의 사람이라면 그 삶도 오직 은혜로만 살아갑니다. 그 은혜를 알게 하고자 그리고 감사한 삶을 살게 하고자 오늘도 살려 살게 하심을 기억하시고 범사에 그 은혜를 알아 감사하며 노래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람들이 우리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주께서 바울을 사도로 사용하시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성경은 어떻게 다릅니까?

3.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일관 된 방식과 그 일을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4. 리가 기대하는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과 성경에 드러난 엘리야의 모습이 어떻게 다릅니까?

5. 갈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6. 불로서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맛 본 이스라엘의 모습과 그들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7. 우리가 인간적인 낙심을 피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주시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엘리야가 혼자만이 남았다고 하는 까닭과 하나님이 칠천 인을 남겼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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