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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

본문 / 1:22-25

 

 

1. 자기 백성의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고 또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오신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이 자신이 원하고 소원하는 것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 기대하며 기도도하고 종교생활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정작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의 하나님만을 고집하는 이 세상에 의해서 배척을 받고 쫓겨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여실히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처럼 세상에 의해서 쫓겨난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믿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자신의 왕으로 또 주인으로 인정하며 무릎 꿇고 사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또 주인으로 믿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세상이 예수님을 쫓아 낸 것처럼 그들 또한 미워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동일하게 세상으로부터 쫓겨남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며 사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예수님께는 자기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과 그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기 백성이 아닌 자로 구별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현상을 보고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이 아닌 자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오직 자기만의 하나님을 고집하며 살다가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임마누엘

오늘 본문을 보면 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23)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이란 말을 아주 친근하게 느끼며 또 좋아합니다. 그런데 왜 이 말이 좋은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이 하나님께서 신자를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 보호해주시고, 소원대로 이뤄주시고, 도와주시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대로 인간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만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죄와 자기 백성과 아닌 자의 구별 그리고 심판과 약속과 생명을 위해 오신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오직 사람들이 좋아하는 축복과 형통을 위해 오신 하나님일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존의 하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자, 즉 예수님의 죄 용서의 은혜에 참여되는 자기 백성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자기 하나님의 무너짐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자기 또한 마땅히 심판의 대상임을 깨닫고 그 심판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백성만이 십자가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이사야서 7장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말은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하나님이 유다를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다의 왕 아하스는 애당초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징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7장의 배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다가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에 의해 침략의 위협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 7장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7:3-7)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으로 인해서 유다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따라서 아하스는 그 어떤 대적이 공격한다고 해도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께 어떤 징조라도 구하라고 하였지만 아하스는 징조 구하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즉 유대 왕 아하스에게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징조는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하스에게는 이미 앗수르라고 하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앗수르라는 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유다 왕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13절부터 보면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3-14)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시는데 과연 하나님이 친히 주신 이 징조가 유다를 복주시겠다는 의미의 징조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라고 하신 하나님은 8절부터 보면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8-9)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다면 유다는 굳게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앗수르라고 하는 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의미의 징조 구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에게 주어질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심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주신 징조인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은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를 복주는 하나님을 생각할 뿐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을 자신을 도우시고 복주시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복주고 세상의 삶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부인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존재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임마누엘 예수가 오심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자기의 하나님은 기껏해야 수호신 수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수호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수호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는커녕 반대로 자기 존재만큼은 세상에 굳건히 세우겠다는 욕망의 흔적일 뿐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입니까? 과연 굳게 세움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또는 장로와 권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세움 받아야할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직분은 내려놓고라도 나는 평생을 하나님을 믿으며 교회를 위해서 일했다는 것 때문에 내 자신이 굳게 세움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늘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는커녕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예수의 오심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마땅한 자를 건지시고 그러한 자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야 말로 감사와 찬양의 전부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오심으로 드러난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존재성이 부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루 세끼 먹고 살 자격도 없는 부패하고 썩은 존재입니다라는 자기 무너짐이 없기 때문에 하루 세끼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나는?’이라고 하는 불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나를 향한 그러한 욕망들을 잘라내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기 백성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자신을 굳건히 세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이기에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예수라는 이름에 해당되는 자기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버리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러한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있기 때문에 그 영으로 말미암아 참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 또한 자기 백성에 속한 신자인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그 길은 좁은 길이며,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은혜만을 굳게 세우기 위한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러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짐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과 욕망을 잘라내고 무너뜨립니다. 하나하나 짓밟으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인되는 그 자리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은혜만 꽃피우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둘러앉아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영원한 예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소원과 그런 나라만을 꿈꾸는 자들에게만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고,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인생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즉 임마누엘은 아주 껄끄러운 말이 되어야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인생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전혀 껄끄러운 말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하나님은 쫓아내고 전혀 다른 가짜 신을 속에 두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인생이, 저주 아래 있던 인생이 그 심판과 저주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소유해서 세상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은 하늘에 속한 그 무엇이 아닌 이 세상에서 자신을 많은 사람들 속에서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욕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 됨을 잊지 말시기 바랍니다. 이제 임마누엘 하신 우리 주께서 우리 안에 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며 오직 주의 은혜의 그릇으로 우리를 세우시고자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린 창세전의 하나님의 계획대로 완성될 것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믿기에 우리의 매일의 삶속에서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만이 찬양되어지고 영광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무엇이 드러나며 또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자들이라 합니까?

3. 리가 임마누엘이란 말을 좋아하는 이유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유다의 아하사 왕이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징조를 거절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는 징조를 구하지 않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임마누엘의 징조를 친히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자기가 부인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존재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 님이라고 합니까?

7.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같은 성정과 죄성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 하나님을 믿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9.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기쁨이 되는 자와 껄끄러움이 되는 자는 어떻게 다른 자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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