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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 신비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본문 / 11:25-32

 

 

1. 첫 번째 신비

오늘 본문에 보시면 신비(개정성경에는 신비로, 공동번역에는 숨은 진리로, 표준새번역에는 신비한 비밀로 번역)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신비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현상 따위가 이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 보고 다 듣기는 하는데 그 보고 듣는 사람들 모두가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알려주려고 신비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 신비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성경의 신비를 아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열려지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는 무엇이 신비입니까? 우선 오늘 본문 32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순종하려는 인간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왜 모든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시는 것입니까?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고서는 긍휼로 구원하신다는 이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은 각기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상(개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신이란 인간의 투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을 다른 일에 반영시켜 나타내는 것을 투사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간을 투사시켜서 나오는 모든 상들을 모아놓은 것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비추면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교회 앞에 유치원부지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저 땅을 보면 목사인 나는 눈물이 나오는데 왜 성도님들은 그런 마음이 없습니까?’ 라고 하였답니다. 그것은 결국 이 목사님의 땅에 대한 욕심이 투사되어 나온 것입니다. 기도하고 헌금해서 그 땅을 사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 하나님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우상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증상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은 그런 우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믿고 살게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섬기면 반드시 나오는 말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순종해서 이런 복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순종하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축복과 저주라는 당근과 채찍을 들고서 자기의 욕망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아니면 화가 나십니까? 아니 인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 하고 항의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말씀에 제일 많이 화가 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을 모르는 자들과 알아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죄인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을 의로운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생각이 바로 높은데 마음을 두는 것이며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꼭 나오는 질문이 그러면 순종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이런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그러면 과연 순종이 어느 정도여야 순종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지만 성경은 아주 쉽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22:37, 39)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이렇게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일부가 잘려나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준엄(조금도 타협함이 없이 매우 엄함)하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은 하나님과도 맞먹으려 드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이 가득한 인간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은 자기들은 하나님을 제일로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직 주의 긍휼과 인자에 거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 22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11:22)고 합니다. 자기들의 실력으로 참감람나무에 붙어있는 줄 착각한 가지들을 잘라내고서 돌감람나무를 접붙인 것은 주의 준엄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자기 자랑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만을 드러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 감추어진 첫 번째 신비인 것입니다.

 

2. 두 번째 신비

이제 두 번째 신비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5절부터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11:25-27)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잘린 것은 영원히 잘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일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가운데 잘려진 가지들이 돌아오는 것도 긍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의 긍휼로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부터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28-31)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이 긍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은 것을 따라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가장 넘기 힘들었던 장벽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증거 되는 일이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그러나 택하심을 말하자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그 조상이란 아브라함과 다윗 같은 언약을 받을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언약하신 것으로 인하여 그런 이스라엘이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에 택하신 자들을 언젠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이방인인 우리가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된 것처럼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 자비와 긍휼을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신 신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긍휼로 구원하시는데 왜 긍휼이어야 하는가 하면 인간의 배후에 있는 마귀를 멸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심어준 생각은 교만입니다. 다른 말로 자존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얻어먹고 살아야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너도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인간을 유혹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배척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되실 텐데 왜 그대로 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창세기 3장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고 하여 원시복음을 약속하시는 장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원시복음을 선악과를 따 먹은 그들에게 주심으로 결국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을 막지 아니하심도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시는 장치가 될 뿐 아니라 그렇게 유혹한 마귀도 멸하시는 장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마귀를 멸하시는 전쟁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조차도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며 또한 마귀를 멸하시는 계기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힘과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최후의 심판이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미혹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안식과 관련하여 한 번 더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6일 만에 창조하시고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창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다음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의 특징은 노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먹고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고 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신비인 것입니다.

 

3. 세 번째 신비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신비를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26절부터 보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11:26-27)고 합니다. 26절에서 구원자가 오셔서 야곱의 경건치 아니함을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야곱 스스로가 경건치 아니한 것에서 돌이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스스로 돌이켜 올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씀이 틀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돌아 올 수 없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 예레미야 13장에 보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고 합니다. 흑인이 자신이 피부를 백인처럼 만들 수 있고 또 표범이 자신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다면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돌이켜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두 일이 불가능하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어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이키게 아니하시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의 말씀은 이사야 59장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59:20-21)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조금 다르게 인용합니다. 야곱의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말씀을 바울사도는 구원자가 임하게 되면 야곱의 경건치 아니함을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것은 21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과 그 말씀이 그 후손에게서 영영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27장에 보면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27:9)고 합니다.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서 그 백성들의 죄악이 속함을 얻는데, 그 결과는 우상 숭배의 제거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시지만 그 결과는 우리를 다스리던 악한 영과 모든 우상을 제거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곳의 말씀을 가지고 복음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돌이키시고 죄를 없이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주의 언약을 따라 죄 없이 함을 받는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결심하고 믿어주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긍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순종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순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고 하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주의 긍휼로 되어진 것임을 알고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을 알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또 때가 되매 그 계획대로 하나하나 성취시켜 나가십니다. 그 계획의 성취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없습니다. 혹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방해를 가지고도 합력하여 선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의 결과가 우리이며 또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와 긍휼이 드러나며 선포되어지기를 기대하십니다. 오늘도 그런 주님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심으로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이 우리의 모든 삶의 터전에서 자랑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을 신비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말씀에서 성경의 신비는 무엇이라 하며 또 그것이 인간의 상식과 맞는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드러난 것은 무엇입니까?

4. 주 안에 감추어진 첫 번째 신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인간의 본분은 무엇이며 또 선악과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6. 주 안에 감추어진 두 번째 신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주 안에 감추어진 세 번째 신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주님의 십자가의 구원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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