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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본문 / 12: 3- 5

 

 

1. 다 이루심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이며 이를 위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을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 세대를 본받아서 말씀을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해석의 대표적인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로 되지만 그 이후로는 내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복도 받고 하늘에서 상도 받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복과 상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더욱 더 열심과 정성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다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들의 신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죽을지라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맹세까지 했음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부인하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이제는 자기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은 속죄만 다 이루셨고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증인도 되고 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다 이루심 안에는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과 재림까지, 즉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의 성취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은 주님의 다 이루심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6-20)고 하십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고서는 이제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도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므로 드디어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명령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루시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2:29-33)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고 나머지 일은 열 두 제자들에게 다 맡겨두시고 하늘에서 누가 잘하나 지켜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친히 성령을 보내시고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사람의 손에 맡겨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므로 모두가 은사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한 몸인 것입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결코 시기와 경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높은지 낮은지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 몸 안에서 분쟁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사의 구체적은 모습은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오늘은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떤 태도와 자세가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2. 믿음의 분량대로

오늘 본문을 보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고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도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성령을 받고서 죄가 무엇인지 또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가 최고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그런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함으로 무엇을 알게 되는가 하면 바로 자기의 분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시대나 지금이나 간에 죄란 인간이 자기의 분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흙덩이로 지어진 피조물이 범죄 함으로 교만하여져서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는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죄 아래 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허황된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초의 죄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었던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동등 됨을 취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하나님께서 임의로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최고로 높은 줄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6절에 보면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2:16)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주의 말씀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과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 시대는 어떻게 하든지 높은데 마음을 두라고 합니다. 목표를 높이는 것입니다. 나라의 예산도 올려 잡고, 교회의 예산도 올려 잡는 것입니다. 만약에 작년보다 줄어들면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모습이 이렇게 살아가고 또 이렇게 돌아갑니다. 뜻을 높이 두고, 꿈을 크게 가지고 그래서 발전하고, 승진하고, 높아지는 것은 복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증거 되어야 할 교회에서 조차 사람들에게 늘 무엇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씀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증거가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전한다는 목사도 문제이지만 그런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는 교인들도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말세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귀를 즐겁게 해줄 거짓 선생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우리들이 교회에 와서 들어야 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직 그것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5:42)고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자 유대인들이 잡아 협박을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자 결국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려 하였으나 사도들은 그 일을 그 이름을 위하여 받는 합당한 일로 여겨 기뻐하며 다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28장에도 보면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28:30-31)고 합니다.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에 올라가 비록 가택연금을 당해 예전처럼 복음전파를 위해 자유롭게 다니지는 못해도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선포되어지고 나누어지고 가르침 받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이든 구약 성경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28:23)고 합니다. 신약은 물론이거니와 구약의 모든 내용도 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란 분은 믿는 자들은 모든 설교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이렇게 요구를 한다면 목사가 성경을 들고서 감히 엉뚱한 것을 설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요와 공급이란 서로 손발이 맞아야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흐름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합니다. 시장만 보이지 아니하는 손이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보이지 아니하는 손이 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걸림돌이며 거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이 세대를 악한 세대로 보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는 것이 복인 줄 아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4-5)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오신 것입니까?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기에 그렇게 흘러가면서도 죄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쳐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인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는 그 흐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적어도 무엇이 악이고 죄인지는 알기에 그런 죄 가운데서 너무나 당연한 듯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보며 그 죄악 가운데서 건지실 주 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가 아닌 오직 주를 찾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3. 한 몸 된 자의 삶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만나기를 원합니까? 많은 돈을 벌어서 보란 듯이 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그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승진의 소식이나 또는 합격의 소식을 가지고 가서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나아진 것으로 자랑하고 싶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세상의 모습이 교회에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 안에서는 결코 누가 높고 누가 낮고가 있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 4절부터 보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12:4-5)고 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몸의 지체끼리 높낮이를 다투지 아니합니다. 서로 몸을 위할 뿐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성도로서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자기를 들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 특징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족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어느 정도입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넘어서는 것은 다 욕심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것으로 만족하다고 여기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발전하고 높아지는 것이 복인 줄 알고 있는 것이 이 세대의 가치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만이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고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의 은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성도는 자기의 형편을 사람들이 볼 때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데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연극을 하는데 그 결말을 이미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배역이 어떠하였더라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완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하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7장에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0-24)고 합니다. 자신의 신분이 종으로 있을지라도 상관없다고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아는 자는 비록 몸으로는 종의 몸이라 할지라도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유를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성령으로만 깨닫고 알게 됩니다. 오늘도 주안에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자유가 더욱 풍성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을 세상 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2. 마태복음 28장의 세상 적인 성경 해석 내용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

3. 성령이 오시기 전과 후에 사도 바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4.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 앞에 죄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 이 세상과 맞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오늘날 듣는 성도들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합니까?

8. 하나님께서 교회인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 특징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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