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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사의 특징과 우리의 회개

본문 / 12: 9-13

 

 

 

1. 이 세대의 거짓된 신앙

바울이 쓴 이 로마서를 많은 사람들이 앞부분은 교리부분이고 뒷부분은 실천부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이고, 12장부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책임지고 실천할 내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데 만약에 책임지고 믿음으로 실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이미도 주신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오직 자기 구원에만 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오는 질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 또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 앞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은혜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취소가 되지 않지만 가난한 신앙생활이 된다고 하는 답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얻은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 되고 또한 이 땅에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늘에서도 상급도 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이 너무 유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또 하늘에서까지 상을 받기 위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까지 연결되어 이야기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된다고들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아의 완성을 위하여 아니면 좀 더 고상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 실천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 세대를 본받아 하는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12:2)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세대는 어떤 세대입니까? 이 로마서는 기원 후 50년 후반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발한 직접적인 죄목은 성전을 파괴하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유일하게 속죄를 받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그 성전을 파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불경죄인 것입니다. 만약에 성전을 파괴하게 되면 속죄를 어디에서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람 되게도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것도 나사렛출신 예수라는 자가 자기에게 속죄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하면서 병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세례요한도 성전에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유일한 속죄 장소이기에 그런 성전이 아닌 곳에서 회개를 외치고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도 성전체제를 위협하는 아주 불순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위와 선포는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에게는 경악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영생이 바로 나다. 나를 아는 것이 영생이며,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는 그들은 그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흉악한 살인강도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로 선택을 받아서 율법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실천한 내용들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내용들입니다. 율법을 생활 속에 적용하기 위한 규례 집까지 만든 자들입니다. 그 중에는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토대로 발전한 구전전승을 보존하고 나타내기 위한 목적을 지닌 할라카라고 하는 것도 있고 또 3세기초 새로 편집하여 완성한 미쉬나도 있으며, 거의 때를 같이하여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 학자들은 게마라라고 하는 해석 작업을 시작하여 수세기 후 이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미쉬나게마라를 합치고 정리하여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를 내 놓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방대한지 모릅니다. 그러한 규례 집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법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습니다. 안식일 날 노동하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하여 무엇이 노동이며 또 무엇이 노동이 아닌지를 해석하고 그것을 다 지킨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장로의 유전이라고 지적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온갖 구체적인 규례들까지 다 지켜온 그들이기에 자신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는다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그런 말을 하는 예수님이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율법 지킴의 행위들을 조금도 인정해 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책망하는 예수님이 잘못 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 당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세대나 막론하고 자신의 행위를 신앙으로 여기고, 자신의 행위를 귀히 여기는 것은 변치 않는 원리입니다. 지금 시대도 예수님의 시대나 바울시대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서 끊임없이 인간의 행위를 보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더 이상 보탤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셔서 친히 자기 몸을 다스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은사를 베풀고 계시는 것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들려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복과 상급을 받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의 내용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행함의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세워놓은 교회라는 조직을 위한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되는 행함이란 언제나 주일성수와 십일조 그리고 전도와 봉사에 집중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만족함을 위한 행함이 아닌 주인 되시고 왕 되신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한지 우리는 항상 말씀을 통해 점검하고 확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겐 불가능한 사랑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행할 수 있는 내용인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책임지고 행하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이야기 하지 않고 자기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행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기 힘든 것은 최선을 다하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최선을 다한다고 한 것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내용들이 이 세대를 따른 해석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12:9)고 합니다. 무언가 실천할 부분이 사랑이라면 어떤 사랑이어야 합니까? 거짓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 즉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내가 널 이렇게 사랑했으니 너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조건부적인 사랑일 뿐이며,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사랑이란 이기적인 자기 사랑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암논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연애하여 상사병에 들었습니다. 다윗 왕이 아픈 아들을 보러가니 다말이 자기에게 과자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왕이 허락하자 다른 사람들을 나가게 하고서는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강제로 범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여 병이 들 정도였음에도 범하고 나서는 그 연애하던 열정보다도 더 미워서 다말을 내어 쫓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만 그 안에는 자기도 모르는 죄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자기의 정복욕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향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에 과연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베풂만으로 나타나는 거짓 없는 사랑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남을 위하여 희생한 살신성인의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 역시 결국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낸 것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죄인들이 죄인을 위하여 희생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적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러나 지체들끼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섬깁니다. 그것은 다 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며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것이 맞기는 한 것입니까? 어느 정도여야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 보면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3-18)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나는 이만큼 사랑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입을 닫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이렇게 나만 사랑한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작 우리가 기도해야할 내용인데 그런데 혹시 정말 이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은혜가 와서 남편이 아내에게 재산의 절반을 이웃을 위하여 내어 놓자고 할까봐 겁이 나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응답이나 그런 주님의 은혜가 피하고 싶은 것이라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느니 또는 형제를 사랑하느니 하는 것은 다 거짓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에서 이런 말씀의 내용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조금만 노력하면 행할 수 있는 것들을 행하게 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거짓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함의 말들이 오히려 우리가 듣기에는 좋지 않습니까? 너무 좋게 들려 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선을 그어놓고서 그것을 행하라는 것이 쉬운 것이지 그냥 믿음으로 하라든가 또는 받은 은사대로 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이런 신앙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 없고 거저 자기 사랑이나 챙기기 위하여 목사와 교인이라는 단체로 모인 다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교회라는 사업체를 운영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3. 회개케 하기 위한 말씀

또 계속해서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2:10)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처럼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을 먼저하고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하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야 하는데 서로 존경하기는커녕 무시하고 깔보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라는 증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몸이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1절에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2:11)고 하는데 우리는 과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지런히 자기를 섬기고 있습니까?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자기를 섬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한절 한절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케 하고 회개하게 만드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12절에도 보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12:12)라고 말씀은 하는데 우리가 정말 그런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 한다는 것은 지금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약속만으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은 나의 소유의 유무에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 참습니까? 환난 중에 참는 것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환난 중에 있지만 이것 또한 나는 다루시며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믿고 바라며 사는 것입니다. 그 환난이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알고 믿는 자라면 그 환난을 통해 나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에 힘쓰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말씀인 13절에도 보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이 당시의 성도들의 쓸 것이란 믿음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 또는 가난한 교회들을 위한 연보입니다. 그들도 극심한 어려움가운데서 힘에 지나치도록 연보한 것입니다. 또 여기서 말씀하는 손님이란 순회전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대접하는 일에 힘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이 실천해야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여야 할 말씀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 회개조차 성령의 은사입니다만 그렇게 회개한 심령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면 정말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기 까지 사랑하고서도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매들이 극히 드물게 나타나지만 그러한 성령의 열매만으로도 살아계신 우리 주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런 말씀 외에 인간이 계획하고 목표하고 자기 뜻들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뜻을 도용하는 일에 대하여는 회개할 것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쓸데없이 자기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이 모여서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도 용서 받은 자고, 너도 용서 받은 자이기에 서로의 흉과 허물을 보지 아니합니다. 시기와 경쟁도 없습니다. 용서받은 주님의 몸에 붙은 것만으로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 몸의 지체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성령의 은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세대를 본받아 성경을 보는 해석은 어떤 내용이라고 합니까?

2.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직접적인 죄목과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바울이 본받지 말라고 하는 이 세대는 어떠한 세대라고 합니까?

4.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5.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의 수준과 우리가 하고 있는 사랑의 수준이 어떻게 다릅니까?

6.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위한 말씀이라고 합니까?

9. 말씀 앞에 회개한 자들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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